23.05.30 15:41최종 업데이트 23.05.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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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자료사진. ⓒ 픽사베이


대학생 시절, 친구와 카페에서 토익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계산대 가까운 곳이라 주문 소리가 들렸는데, 무심하게 흘리던 중 한 할머니가 카운터에서 메뉴를 묻는  것이 유독 귀에 꽂혔다. 무심코 쳐다본 문 앞에 커다란 리어카가 세워져 있었다.

폐지를 줍거나 좌판 장사하는 분 같은 할머니는 이런 카페에 처음 오신 듯했다. 주저하는 목소리로 아르바이트에게 그냥 커피는 없는지 물었다. '그냥 커피'는 없으니 메뉴판 보고 주문해 달라던 알바의 태도는 내가 보기에도 차가워서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의 주문을 도와드릴까 한참 고민했다.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페모카, 카푸치노, 캬라멜 마키아토… 지금까지 카페에서 수백만 원은 썼을 테지만 사실 나도 정확히 이게 어떤 메뉴인지 모른다. 할머니는 결국 스팀 밀크라는 이름의 따뜻한 우유를 주문해 드셨다. 자리에 편히 앉지도 못하고 카페 구석에 선 채로. 아마 아는 메뉴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독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외출하면 열에 한두 번꼴로 길을 알려달라거나 발권 등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사이비나 판촉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대부분 노인이거나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길이 바쁘더라도 웬만하면 도와드린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환승역 입구까지 동행하기도 한다.

많은 경험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태도가 침착하고 발음도 또렷했다. 서울 지하철을 처음 타본다는 말에 키오스크를 쓰기 어려워 도움을 청한 줄 알고 발권을 대신 해드리기로 했다.

목적지를 묻고 입력하는 과정에서 뭔가 더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할머니 질문 중 일부가 바로 앞 한글 안내판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을 읽지 못한 할머니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침착한 태도로 최선을 다하고 계셨다. 

가끔 서울의 번화가를 걷다가 간판과 판촉물들을 본다. 영어가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신촌의 연세로나 명동, 신림역 부근 등에서 한글 간판을 찾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는 걸 느낄 때마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느낄 소외감이 떠오른다.
 

ⓒ 백가을

 
그리고 지하철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의 세계는 얼마나 더 아득할까? 필수적인 이동이나 구매를 위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청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불안이 짐작도 되지 않는다.

기획재정부에서 조사한 한국의 문맹률은 1.7%로, 전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인구를 명수로 환산하면 87만 명 이상으로 결코 적지 않다.

이들의 대다수는 역사적 이유나 사회 안전망 사각지대에 있다는 이유로 의무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과 시각장애인이다.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의미다.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진입을 제한하는 사회적 장벽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력 감축과 업무 효율화를 위해 키오스크를 도입하는 식음료 매장이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키오스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나 키오스크로 인해 새롭게 발생하는 업무도 있다.

서울페이 결제 가능 식당에 갔는데 키오스크에서 서울페이를 찾을 수 없는 경우는 양반이다. 메뉴판에 알레르기 유발 재료 정보 등 충분한 설명을 듣기 어렵고 교환권이나 상품권이 읽히지 않아 하염없이 담당자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부지기수다.

고군분투를 이어가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는 줄이 길어진다. 눈치를 보다가 취소하면 다른 가게로 갈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 모든 수고를 반복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직원을 찾아 문의하면 키오스크를 쓰라는 말을 반복해 듣다가 직원이 대신 키오스크를 사용해 주는 결말을 맞는다. 내 돈을 쓰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수고를 쓰면서도 멋쩍음과 미안함에 사로잡힌다.

키오스크 주문의 문턱을 사용자 인터페이스(UI) 개선으로 낮출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여러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좀 더 편안하게 주문할 수 있을 뿐, 근본적인 방법은 아니다.

한글(또는 다른 언어)을 읽을 수 있으며, 메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고, 필요한 것이나 원하는 품목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결제 수단 활용에 능통한 경우라야 키오스크 사용자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주문 외에도 업장이 고객에게 소개하고 안내했던 여러 업무를 모두 고객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세 가지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일들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은 모두 크고 작게 사회적 소외를 강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르는 사람은 주문하기 어려운 복잡한 이름의 메뉴나 읽을 수 있는 인구가 한정된 영문 간판, '디지털 문맹'의 업장 사용을 간접적으로 막는 키오스크.

굳이 '노키즈존' 또는 '노시니어존'이라는 표지를 만들어 붙일 필요도 없다. 노약자나 장애인,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나 업장의 기준에서 '충분히 세련되지 않은 사람'이 오지 않길 바란다면, 이들은 사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장벽을 만들어 해당 세계의 문법을 모르는 사람의 진입을 제한하면 된다. 

누군가를 버리고 가는 게 효율일까
 

공용 컴퓨터. 자료사진. ⓒ 픽사베이


혹자는 사기업이 원하는 방법대로 업장을 운영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백번 양보한다 치더라도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식업계를 중심으로 먼저 보급된 키오스크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전환을 기점으로 이제 은행과 관공서 등 필수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기관에도 보급되었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비대면 행정의 시대다.

최근에 청년월세지원 신청을 위해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가 인터넷으로만 가능하며 창구 접수는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 시절의 나처럼,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청년도 있다. 기기를 구매하거나 통신비를 낼 돈이 부족할 수도 있고 본인 명의 휴대폰 번호가 없는 경우엔 인증서를 저장하고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공 도서관 등에 비치된 공용 컴퓨터나 피시방의 컴퓨터를 써야 한다.

시간도, 품도, 노력과 용기도 몇 배가 들고 감수해야 하는 보안상의 위험도 크지만,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다 해보기 전까지 모른다. 공용 컴퓨터에는 특이한 보안 시스템이 깔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기나긴 로딩과 재시도, 이해할 수 없는 승인 거부 앞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곤 했다. 막막함과 피로감에 울었던 적도 있다. 나는 그나마 도서관 이용법에 능숙하고 끈질긴 성정이다. 나만큼 버티지 못하고 탈락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금 없는 버스도 사각지대를 넓히는 시스템이다. '사고를 방지하고 현금 지불로 인한 지연 시간을 단축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현금 없는 버스는 카드로만 이용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사람은 해당 버스를 이용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인 이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범위가 줄어드는 안타까운 처사라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가 정말로 '효율적'일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효율적인가? 업무 자동화와 체계화를 추구하는 기계의 도입에는 언제나 해당 기계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불만과 설계 목적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예외가 따른다.

전화 문의를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안내를 지나 상담원 연결을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기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직원을 호출해 대면으로 문의를 한다. 키오스크가 주문을 대신해 줄 거라 교육받은 아르바이트들은 키오스크를 사용하라는 대답만 반복하고, 손님은 답답함과 소외감을 느끼며 포기한다.

현금 없는 버스의 경우, 평소 카드를 이용해 비용을 지불하면서 때론 현금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깜빡 잊고 카드지갑을 두고 왔을 때,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어 전원이 꺼졌을 때도, 이제는 현금을 쓸 수 없다.

한글과 영어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사용 능력까지도 생활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문법이 된 사회에서 이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의 소외는 점점 증가한다. 그리고 이 소외는 그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소외를 증가시키는 체계에서, 한 사람이 언제나 시스템의 안에만 머무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체계, 소외되는 사람이 적은 사회에서는 소외계층뿐 아니라 비소외계층의 일상 또한 더 편안하다. 우리 사회가 효율성을 어떤 기준으로 정의하고 있는지 돌아보길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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