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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스포츠 프로그램 생중계 하듯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상황을 실시간 떠들고 있다. 세계에서 반전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국익을 위해 미국 전쟁 지지와 파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도 중간중간 나온다.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어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봄 햇살이 따뜻하게 퍼져있다. 완연하게 퍼져 있는 봄기운이 익숙하지만 낯설게 다가온다. 이 평화로운 봄날 세계는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 마음 한 구석을 묵직하게 만든다.

전쟁에 참여했던 노장과 나란히 손잡고 산책하던 그 날도 오늘처럼 봄내음이 물씬 느껴졌었다. 그날 노장은 어색함과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내 손을 평소보다 더 꼭 잡고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낮 동안 치매와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을 돌봐드리는 주간보호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한적한 오솔길이 있다. 질척하게 땀이 나는 노장의 손을 달래듯 잡고 걷는 오솔길에 새싹들이 새초롬하게 얼굴을 내밀고 가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우리를 감싼다.

그날 아침 노장은 주간보호센터 화장실에서 실수를 했다. 노장은 당황하여 숨기려 했지만 센터 안으로 파고드는 구린 냄새로 금방 탄로가 났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자고 말하자 노장은 괜찮다면서 본인이 다 닦았다고 중얼거렸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노장의 곤색 운동복 바지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혼자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이다.

간병인들이 옷을 갈아 입혀 드리겠다고 해도 싫다고 고개를 흔드신다. 할 수 없이 노장의 배우자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노장은 초기 치매 진단을 받고 낮 병원의 개념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을 돌봐드리는 주간보호센터에 입소했다. 중령으로 제대한 노장은 가벼운 뇌출혈 후 약간의 언어장애가 왔다.

노장은 무뚝뚝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짧지만 순간 재치있게 던지는 농담으로 주간보호센터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임을 진행 할 때 본인이 이기거나 잘했다고 생각될 때 입이 귀에까지 걸릴 정도로 웃는 노장의 얼굴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예전에는 골프를 잘 해 본인을 이길 사람이 없었는데 아프고 나서는 잘 안된다며 씁쓸해 하거나, 요즘은 이상하게 단어나 문장이 기억 안난다고 말하는 노장의 눈동자는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노장은 매일 아침 올 때마다 내 손을 잡고 사람들 없는 데로 끌고 가서 선물이라고 말하며 주먹 가득히 사탕을 건넸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은 꼭 산책을 가자고 했다.

그 날도 당황한 노장은 아무 일 없이 다른 날과 똑같다는 것을 본인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납득시키고 싶어했다. 다른 날과 변함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시로 운동복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노장의 손에는 오물이 묻은 사탕이 무안하게 얹혀져 있었다.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노장의 사탕을 받았다. 사탕을 버린 후 손을 씻으며 살며시 올라오는 눈물을 훔쳤다.

배우자가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자고 하자 반대하지 않고 갈아입었다. 아무 일 아니라며 소파에 앉는 노장을 뒤로하고 배우자와 상담을 했다. 피곤함이 묻어 나오는 배우자의 표정은 그래도 밝아 보였다. 아프기 전에는 너무도 자상했던 남편이 저렇게 되어 속상하고 불쌍하다고 말문을 연 노장의 아내는 요즘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한 번은 적군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베개 밑에 칼을 넣고 자야한다고 해서 한참 실랑이를 했었다고 한다. 그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적군이 죽이러 온다고 주위를 살피다 잠이 들곤 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딸이 화장실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데 갑자기 달려들어 목을 조르며 너는 누가 보낸 베트콩이냐고 소리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는 배우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때 딸도 울고 본인도 소리내어 울었다고 이야기하는 배우자의 손을 잡고 위로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배우자가 간 후 노장에게 산책을 가자고 제의했다. 웃으며 흔쾌히 동의하는 노장의 손을 이끌고 센터 뒤쪽의 언덕길을 따라 산책했다. 산책로 뒤쪽 오솔길에 한가롭게 놓여있는 의자에 노장과 나란히 앉아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나무들 그리고 교회 십자가 수를 하나 둘하고 같이 세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날씨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노장에게 전쟁에 나가본적 있냐고 묻자 6·25 때는 어렸었고, 군대에 있을 때 월남전에 참전했다고 이야기하며 군대에서는 계급이 높았다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본인이 부대를 이끌고 갔었다고, 거기서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고 말하는 노장의 눈이 추억에 잠겨 아득해졌다.

잠시 침묵 후에 노장의 입에서 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 곳에서 사람도 많이 죽였고, 같이 싸우던 동료도 죽었다며 전쟁은 무서운 것이라고. 순간 긴장하며 벌떡 일어난 노장은 가자며 내 손을 잡았다.

노장과 함께 돌아오는 짧은 산책길에는 새로 돋아난 새싹과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펴 있었다. 그 봄날의 산책은 노장의 기억 속에 요동치는 전쟁의 기억과는 정반대로 평화로웠다. 화염에 불타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지구 한쪽과는 정 반대로 화창한 날씨를 뽐내고 있는 봄 날씨를 보며 노장과 함께 했던 봄날의 산책이 문득 떠올랐다.

치매에 걸린 노장의 뇌 한쪽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또 누군가 간직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망각의 늪인 치매의 끝자락까지 파고드는 전쟁의 상처를 새롭게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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