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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적자산에서 바라 본 제주도 한라산
ⓒ 박진강
간만에 봉순이를 데리고 산에 가는 길입니다. 부용리 마을 회관을 지나 낙서재 길로 접어듭니다. 오늘은 적자산을 넘어 뽀리기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경사가 급하고 가파르지만 그래도 산이 높지 않으니 적자산(432m)까지는 3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봉순이 때문에 자주 쉬느라 발길이 더딥니다. 힘겹게 뒤쫓아오던 봉순이가 심하게 헐떡이며 또 쉬었다 가자합니다. 처음 집을 나설 때는 흥분해서 나를 끌고 가더니 이제는 내 손에 끌려옵니다.

"봉순아, 너도 많이 늙었구나".

여덟 살, 개 나이로는 노년기에 접어든 봉순이에게는 산길을 오르기가 여간 버겁지 않겠지요. 나이도 나이지만 늘 묶여 있다 갑자기 운동량이 많아지니 힘에 부칠 만도 합니다.

내가 뽀리기 재를 바로 넘지 않고 적자산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순전히 날씨 탓이었습니다. 하늘이 너무 푸르고 대기가 맑아 오늘은 한라산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었지요.

적자산 능선을 따라 5분 남짓 걸어가니 누룩바위가 나옵니다. 역시 기대처럼 누룩바위에 오르자 한라산이 거기에 있습니다. 뱃길로 두 시간 남짓, 보길도에서 제주도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보길도 사람들도 겨울철이면 제주의 감귤 농장에 계절 노동자로 품 팔러 다니곤 했지요. 옛 글처럼 산천은 의구한데 사람은 자취도 없습니다.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한라산은 온전히 제 모습을 다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한라산 아래는 안개구름에 쌓여 있고 하늘 섬처럼 구름 한가운데 한라산이 떠 있습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산이 저와 같을까요.

있으라 있으라, 발길을 사로잡는 누룩바위를 벗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뽀리기재를 넘어 보옥리 옥산의 암자터에 갈 참입니다. 백년암. 오늘 내가 찾아가는 암자터는 조선조 명종 때의 고승 진묵대사의 토굴터로 알려진 곳입니다. 진묵대사가 보길도에 토굴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몇 년 전 실상사 도법스님한테서였습니다.

아니지요. 진묵대사 토굴터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벌써 30년도 전입니다.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을 도법 스님이 상기시켜준 것이었지요. 진묵스님에 관한 전설을 처음 들었던 것은 나의 조부님에게서였습니다.

조부는 티끌이었다
조부는 구름이었다
조부는 강물이었다
조부는 바다
정박을 모르는 배

비를 부르는 바람
조부는 천둥 번개였다
조부는 묘지였고
집터였다
초분이었다
움막이었다
조부는 흙이었다
티끌이었다


내 조부님은 지관이었습니다. 조부님은 집안 일 팽개치고 평생을 구름처럼 떠돌았지요. 완도 지방에서 제법 이름난 지관이자 풍수가였던 조부님을 따라 나도 완도 인근의 여러 섬을 다녀봤고, 보길도, 노화도, 넙도, 소안도 구석구석 안 가 본 곳이 없었습니다. 나침반 하나 들고 조부님은 집터며 묘 자리며 명당을 찾아 다녔고, 지금 넘는 뽀리기재도 무시로 넘어 다녔습니다.

조부님을 따라 뽀리기 재를 넘으면서 진묵대사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진묵스님이 살던 절터가 저기란다."

조부님이 말씀 하셨지만 나는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조부님이 늘 이야기 해주시던 윤 고산이나, 서산대사나 사명당 스님의 신화 같은 이야기가 어린 나에게는 모두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도인들이었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들.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리고, 용을 낚고, 왜군들을 물리친 이야기들.

내가 어릴 적 조부님께 늘 듣던 '이웃 마을 할아버지' 고산을 뒤늦게 다시 알았던 것처럼 진묵 스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내가 훌쩍 자라 어른이 된 뒤였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고승 대덕이 있었고, 도력 높은 큰 스님들이 많았지만 내가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스님은 원효도, 의상도, 만해도, 만공도, 성철도 아니었고, 혜능도, 마조도, 임제도, 백장도 아니었습니다. 진묵스님이었습니다.

그 진묵스님이 보길도에까지 들어와서 수행했다는 사실은 나를 늘 가슴 뛰게 합니다. 나에게 보길도가 소중한 땅인 것은 고산 윤선도가 놀던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묵스님이 수행했던 땅이기 때문입니다.

▲ 보길도 백년암 터 앞의 너럭 바위
ⓒ 강제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진묵스님 이후로도 백년암은 여러 고승들의 수도처였을 것입니다. 암자 터에는 시대를 달리하여 지었다 허문 집터의 흔적들이 겹겹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근 법주사 주지 석지명 스님이 어떤 신문에다, 지명 스님의 할아버지 스님이자 근대 한국 불교계의 큰 스승인 금오대선사(1895~1968)가 보길도의 바다가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썼더군요. 보길도에 남은 절 터 중에 바다가 보이는 절터는 백년암 터 뿐이니 금오대선사의 수행 터 또한 백년암 터가 맞을 것입니다.

진묵대사(震默大師)는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지기도 했다 합니다.

진묵스님은 조선 명종17년(1562) 전북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나 7세 때 전주 봉서사로 출가했으며 1633년 봉서사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진묵스님의 행장기는 정리된 것이 없고, 다만 초의(草衣) 선사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攷>에 진묵스님의 18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 모든 행적들은 민간에 전승되는 것들이지요.

진묵스님의 기이한 행적은 어릴 때부터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진묵스님이 막 출가했을 때 일이었다고 합니다. 일곱 살 나이로 출가한 진묵스님에게 조석 예불 때 불전에 향과 차를 올리는 소임이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봉서사 여러 대중들의 꿈에 일시에 금강 밀적신장이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 호령을 했다고 합니다.

대중들은 듣거라, 새로 오신 동자스님께 향로다기를 들려서 신중단에 나오시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불보살님을 모시고 받드는 신장인데 어찌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인 동자스님께 향다를 올리게 하느냐. 우리가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아침저녁으로 우리를 편안케 해달라.

절에서는 그 후 어린 진묵스님에게 향다 올리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주 봉서사에 있던 스님이 어느 해에는 상추를 씻다가 멀리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껐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점심 공양할 상추를 씻고 있던 진묵스님이 갑자기 상추로 물을 떠서 공중에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스님이 다들 상추를 기다리느라 공양을 들지 못하고 있는데 상추를 가지고 웬 장난이냐고 타박했겠지요.

그러자 진묵스님은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나서 끄는 중"이라 말했다지요. 다른 스님은 어이가 없었서 웃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한달 후 해인사의 한 스님이 봉서사로 찾아왔다지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해인사 화재 사건이 나오고 장경각에 불이 나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쪽에서 비바람이 물려와 불이 꺼졌다 했겠지요. 불이 꺼진 후 살펴보니 상추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있었다지요. 그렇게 진묵스님의 이적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전설이란 그저 전설일 뿐 사실 여부를 따질 것은 못됩니다. 진묵스님이 보였다고 하는 이적들이란 것도 기실 진묵스님을 존경하고 추앙하던 당대나 후세 사람들이 지어내고 부풀린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님은 오히려 종교가 신통력 따위를 내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초인적, 신비적 능력과 진리는 관계없다고 단언하기도 했지요. 전주 청량산 목부암의 나한들과 관련된 스님의 설화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어느 때 동자승으로 변한 나한들이 진묵스님을 골려 먹을 심산으로 깊은 시냇물을 건너면서 물이 얇다고 속여 진묵스님을 깊은 물 속에 빠뜨린 일이 있었다 합니다. 그때 진묵 스님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한들에게 일갈했다지요.

"너희 영산 16 나한들에게 말하니 신통과 묘용은 내 비록 너희에게 미치지 못하나 대도는 마땅히 나 진묵에게 물어야 하리라."

스님이 변산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다른 스님들이 모두 출타한 뒤 진묵스님은 홀로 <능엄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탁발 갔던 스님들이 돌아와 깜짝 놀랐습니다. 진묵스님은 손가락에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책을 읽던 자세로 삼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문지방에 올려놓았던 손가락이 바람 때문에 열리고 닫히는 문틈에 끼여 피가 난 것도 모른 채 며칠 밤을 보낸 것이지요.

진묵스님은 만년에 전주 봉서사에 주석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시자와 함께 개울가를 거닐다가 문득 물가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모습이다."

그러자 시자가 답했습니다.

"이것은 큰스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너는 다만 나의 거짓 모습만 볼 줄 알았지 석가의 참모습은 모르는구나"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또 스님은 출가자의 몸이었지만 어머니를 평생 절 근처에 모시며 지극히 봉양했다고 합니다. 출가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지요. 출가가 삶을 버리고 인간을 버리는 행위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신 것이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바친 제문은 스님이 얼마나 삶을 소중히 했고 효성이 지극했는지를 절절히 보여줍니다.

열 달 동안 태중에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갚사오리까? 슬하에서 삼 년을 키워주신 은혜를 잊을 수가 없나이다.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만족하지 못할 일이 온 데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니 어머니 수명이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표주박 한 개로 노상에서 걸식하며 사는 이 중은 이미 그러하거니와 비녀를 꽂고 규중에 처하여 아직 시집가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공양도 마치고 중들은 각기 방으로 돌아갔으며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이 온데 어머님의 혼신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 슬프고 슬프도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뿐만 아니라 누이동생을 소중히 아낀 일이나, 나한전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청신녀의 소망을 들어달라고 나한들의 뺨을 때린 일화들 또한 스님이 결코 탈속한 척 하거나, 신비적인 해탈만을 추구하며 세속의 일들,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반증일테지요.

진묵스님은 계율에 얽매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는데, 요즈음 우리가 흔히 술을 달리 부를 때 쓰는 곡차나 굴을 달리 부르는 석화(石花)라는 말이 모두 진묵스님으로부터 유래됐습니다. 스님은 술을 유달리 좋아했는데 술이라고 하면 절대 마시지 않았고 곡차라 해야만 마셨다고 합니다.

스님이 술 마시는 것을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쌀과 누룩으로 만들었으니 곡차지 왜 술이냐 했다지요. 세속인들은 취하기 위해 마시니 술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기분도 상쾌해지니 곡차라 했다지요. 어느 때인가 곡차를 동이째 마시고 읊었다는 게송이 지금껏 전해집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벼개 삼아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잔을 삼아
크게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니
긴소매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네.


스님이 김제 망해사에 계실 때는 바닷가 근처라 해산물들을 잘 드셨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굴을 따서 드시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왜 스님이 육식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지요. 그러자 스님은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다 그랬다지요. 굴이 돌에 붙은 모습은 영락없이 돌에 핀 꽃과 같습니다.

본디 부처님이 육식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합니다. 부처님도 걸식을 하셨는데 걸식을 하면서 고기는 빼고 또 무엇은 빼고 달라고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지요. 그저 시주하는 사람이 주면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먹었겠지요.

음식이란 단지 생명을 이어가는 약과 같은 것이었으니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진묵스님이 굴을 석화라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을 테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의 현신이라 불리던 진묵스님다운 일화들입니다.

진묵스님이 출가자로서 계율에 얽매이지 않은 모습은 예수님과도 닮았습니다. 율법에 매달려 안식일에는 사람이 죽어가도 치료를 해주지 않던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 랍비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고 크게 호통치셨지요.

뽀리기 재를 넘어 20분쯤 내려가자 백년암 터로 가는 갈래 길이 나타납니다. 자주 이곳을 찾았지만 나는 늘 차를 타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어린 날 내 조부님과 함께 걷던 고갯길을 넘어 진묵스님 토굴터에 갑니다.

내리막 길이라 봉순이도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암자는 오래된 기왓장과 시커멓게 그을린 구들돌, 석축의 흔적들만 남기고 폐허가 된 지 오래입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솟아나는 샘물만이 진묵스님의 법어인 듯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 보길도의 일몰
ⓒ 강제윤
이 곳 백년암 터 또한 진묵스님이 수행했던 서해안의 여러 수행지들처럼 낙조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진묵스님은 유난히도 낙조를 좋아했다지요. 스님이 계시던 김제 망해사나 변산 월명암이 모두 유달리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지요.

해가 지는 저물녘, 스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해가 떨어질 때마다 스님의 한 생도 저물어 그 숲 속의 많은 나날들 동안 스님은 수백 수천 생의 바다를 건너갔다 왔던 것일까요.

해가 집니다. 오늘도 나는 불타는 낙조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합니다. 한 생의 바다도 건너지 못한 채 서둘러 산길을 넘어가는 중생의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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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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