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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농지개량조합이 1925년에 벽골제 제방을 훼손하여 만든 수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농토가 당초 벽골제의 물이 차 있던 자리다.
ⓒ 이철영
제방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마른 풀들이 바스락거리고 내딛는 걸음마다 컬컬한 먼지가 날린다. 제방 한 가운데로 큰 물길이 흐른다. 물길은 운하마냥 잔잔하고 고요하다.

그 옆으로는 고추 밭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밭이 들어설 자리는 아닌데 이 땅 사람들은 어디에고 한 뼘 땅만 있다면 무언가를 심는다. 어느 곳에나 뿌리를 내리는 잡풀들처럼 우리들은 이 땅에 기대어 살아왔다. 내가 잡풀의 후손이고 내 몸뚱이가 잡풀이다.

▲ 명금산. 통일신라 원성왕 때 벽골제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김제 태수 유품의 딸 단야낭자가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이철영
잡풀 같은 생명력을 이어받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2006년에 살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리. 수백만 년 전 조상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제방을 쌓았던 백제인들의 땀이 얼굴 위를 흐른다. 나는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현장의 인부였으며 벽골제 건설현장에 동원된 백성이었다.

그들의 몸속에 흐르던 피의 힘으로 나는 오늘 제방 위를 걷는다. 17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제방인데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들거리는 키 큰 풀들이나 코 끝 찡한 바람의 냄새도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다.

▲ 벽골제의 수문지였던 '경정거'의 수문석주. 높이 5.5m, 폭 75cm, 두께 50~60cm의 돌기둥 2개가 4.2m의 간격을 두고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사이에 나무판을 끼워 수량을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 이철영
키를 넘는 풀숲 사이로 갑자기 육중한 돌기둥이 솟아오른다. 영락없는 수말의 거시기다. 그것은 암컷인 대지를 뚫고 올라와 대기 중에 수컷의 냄새를 뿌리고 있다. 아! 생명이여. 그렇게 암수가 만나 이 대지를 살찌웠구나. 그렇게 만나 들이 곡식을 기르고 곡식이 사람을 길렀구나. 세상에 암수 아닌 것이 있던가? 그것의 정체는 '경장거'라는 벽골제 제4수문의 돌기둥이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신라 흘해왕 21년(330년)에 축조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기록이므로 실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이 곳에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인데 기록 이전인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고도 한다. 그 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년)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2년(1420년)에 폭우로 유실된 뒤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 수리민속유물전시관 전경.
ⓒ 이철영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 이후에도 용수 공급을 위해 제방을 다시 축조해야 된다는 의견과 홍수 등에 따른 제방의 관리책임을 우려한 관리들의 반대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재원마련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해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1925년 일제 당시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는 제방의 한가운데로 관개용 수로를 개설하여 그 원형을 크게 훼손시켜 버리고 말았다.

벽골제가 위치한 김제만경 평야는 호남평야의 중심으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 농업생산력의 중심이었다. 이곳이 벽골제인 것은 예로부터 '볏골'로 불릴 만큼 쌀의 생산이 많았기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만큼 이 곳 백성들의 삶은 풍요로웠을까? 정반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생산이 활발한 만큼 소유의 집중도 심화됐고 수탈도 심했다.

▲ 김제만경평야가 무대인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아리랑 문학관'.
ⓒ 이철영
목포항을 키운 이유와 마찬가지로, 일제는 김제만경평야의 미곡 수탈을 위해 군산항을 개발했고 그곳에 이르는 전군가도를 개설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군산은 김제의 쌀을 실어내기 위한 부속무대다. 그런 가운데 전국 최초의 도로인 전군도로가 생겨났다. 쌀을 실어내기 위해 만든 끔찍한 도로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전군가도를 달리면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 수탈이 이뤄진 피눈물 나는 도로의 벚꽃축제를 단순히 축제로만 즐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제시 장화동의 정진학(70)씨는 "옛날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여그 와서 쌀로 바꿔가고 그랬제. 여그가 쌀 많키론 제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럼 여기는 흉년도 없었겠네요?"라고 묻자, 그는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뭐가 그래도 숭년이 없어, 숭년 없는디가 어디 있당가?"고 대답했다. 이 땅의 풍부한 산물을 자랑으로 여기고는 싶되 그들에게 풍요의 기억만이 자리 잡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 전북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 정종수씨 댁의 쌀뒤주. 조선 고종 때 만든 것이다. 만석꾼인 정씨 가문은 하루에 수백 명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집 안마당에 거대한 쌀뒤주를 만들었는데 70가마의 쌀을 넣었다. 이것도 한달 식량이 못 되었다고 한다.
ⓒ 이철영
정진학씨네 마을에는 그 동네 최고의 갑부였던 만석꾼 정씨 집안의 뒤주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 고종 때 하루에 수백 명의 식객이 드나들었다는 그 집에서 밥을 해대기 위해 마당에 세운 것인데 쌀이 70가마니가 들어가고 그것도 한 달이면 동이 났다고 한다. 이 곳의 생산력과 풍요를 말해주는 상징물이다.

▲ 김제시 입석동의 월촌 입석. 음력정월 보름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남녀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 뒤 줄을 입석에 감아 놓는 전통이 있다.
ⓒ 이철영
가까이 있는 월촌리 입석도 김만평야의 상징물이다. 인근 마을에서는 음력정월보름이면 남녀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가 이겨야 대지가 감응을 하여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다.

벽골제에는 벼농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수리민속유물전시관과 벽골제의 전설을 간직한 단야각과 단야루가 있다. 맞은편에는 김제만경평야의 삶을 고리로 이야기를 풀어간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그 옆으로는 제방공사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이 짚신을 털어대 그 흙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는 '신발털미산'이 있는가 하면, 산 밑에는 일을 나온 장정들의 수를 세기 위해 만들었다는 '되배미'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벽골제는 누구나 공감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시굴만 되어 있을 뿐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귀중한 역사적 진실들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 사보 9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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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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