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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돼지 잡는 날은 시집장가 가는 날, 초상난 날, 추석과 설인데 그 때는 온 동네 잔치가 벌어집니다. 순대와 내장을 썰어 밥을 말아 먹으며 미리 기운을 차리죠. 아직도 이런 마을이 있을까요?
ⓒ 시골아이 김규환
책보를 말래에다 던져놓고 측간으로 갔다. 오줌을 누면서 돼지 막을 쳐다보니 여전히 우리 돼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추석을 닷새 남겨둔 날부터 사흘 째 시위를 하고 있다. 어찌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요행을 바라듯 고개를 쳐들고 있는 꼴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 몰골이다.

그 귀엽던 까만 새끼돼지를 아버지는 겨를 아껴주라고 했는데 몰래 반 바가지씩 가져다주며 반은 애지중지 내가 키웠다. 숯덩이가 생기면 깨물어 먹으라고 던져줘 등짝은 반반해지고 털은 윤기가 반들반들 참으로 잘도 키운 나였다.

간혹 배고플 참이던 오후 서너 시에 “꽥꽥” 울부짖는 통에 내게 작대기로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 못지않게 아끼던 가보 2호다. 구정물통에서 밥알 하나라도 더 건져주려 애썼던 내 어린 시절 친구였다.

돼지가 밥을 먹지 않은 건 동네 아저씨들 몇이 다녀간 뒤였다. 우리 앞에서 “딱 좋구먼. 이걸로 하더라고” 하고는 행여 돼지가 낌새를 알아차릴까 마루로 가서 산 채 근당 400원씩 하기로 정하고 가셨다.

우리에게도 “쉬쉬” 하라고 했다. 소가 그렇듯 팔려가기 전엔 본채에서 수군거리는 소릴 듣고도 귀신같이 제 죽을 날짜가 임박하면 그 좋던 먹성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식음을 전폐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속으로만 헤어질 준비를 하지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누굴 닮아서인지 영물이 따로 없다.

소변을 누고 정지로 갔다.

“엄마, 돼지가 밥을 안 묵으요. 글다가 글량(무게) 안 나가믄 안 되는디….”
“어쩌 겄냐, 녈까장 지달려야제.”
“몽근 져(겨)라도 주꺼라우?”
“소용없는 짓이여.”

시름시름 앓듯 힘이 없고 눈까지 빨갛게 충혈되었다. 불쌍하지만 도리가 없다. 명절을 쇠려면 돈이 필요하고 더 길러봐야 사료 값이 더 드니 백오십 근 90kg 내외에서 팔아치우고 새끼를 몇 마리 사 넣어야 한다. 괜스레 갖고 있어야 난데없는 초상이나 기약 없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혼인할 때까지 기다리면 손해가 더하잖은가.

▲ 집집마다 까만 흑돼지를 한두 마리씩 길러 마을에서 긴요하게 쓰였지요. 반 근, 한 근을 떠가는 사람도 많았고 두 근 이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가장 맑고 크며 둥근달이 큰 쟁반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사별해야할 돼지다. 움막 앞으로 저녁밥을 먹고 갔다. 힘없이 누워서 배가 오르락내리락 숨을 몰아쉬고 있다. ‘미안하다 도야지야. 헐 말이 없당께. 참말이여. 늬도 알제?’하며 위로하고는 한동안 머무르다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학교를 다녀왔더니 집안은 명절을 쇠기 위해 동네에서 가장 큰 일을 하느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것이다. 내일이면 그토록 바라던 추석이다.

정지에선 물이 팔팔 끓고 있다. 아저씨 둘이 돼지 똥 범벅인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뒷다리를 일순간에 나꿔챈다. “꽥꽥” 소리를 지르는 동안 새끼줄로 앞다리는 앞다리끼리 뒷다리도 뒷다리끼리 묶고는 앞뒤를 한 데 묶는다. 밖에선 말목 대여섯 개를 빼서 들고 나오기 좋게 길을 터놓았다.

“짐샌(김씨), 끌어내자마시.”
“글더라고. 자네가 앞다리 잡고 먼처(먼저) 나가부러.”

나는 여전히 마당 한가운데서 “끙끙”거리며 좌우로 몸을 비틀고 있는 돼지를 끝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마샌(마씨 아저씨)이 대칭저울을 들고 돼지 앞으로 왔다. 사람 키만큼 길고 야구방망이만큼 두꺼운 저울 막대를 끼운다.

“하나, 둘! 우까.”
“찌울렀구만. 반반하게 해봐.”

한쪽으로 약간 기울자 반대쪽이 조금 낮춰준다. 거꾸로 매달린 돼지가 대롱대롱 한쪽으로 돌더니 잠시 멈춰 방향을 바꾸어 돌 무렵이다. 그 때 눈금을 보아야 한다. 제3자인 마샌과 아버지가 동시에 눈금을 보았다.

“백 서른 닷 근이구먼.”
“성님 말이 맞소.”
“피로 서근 떰세.”
“그저께부터 밥을 안 묵었응께 떨 것도 없어라우. 한 근만 떨어도 될 것인디….”
“두 근만 떨지 뭐. 글량이 잘 나오겄어.”

피를 떤다는 건 산 채 잡는 가축이 갖고 있는 물과 오줌똥, 또는 다리를 묶었던 새끼줄 따위 허수를 덜어낸다는 뜻으로 대개는 두세 근에서 많으면 다섯 근까지를 감하기도 하는 관행이었다.

“살짝 내려놔.”

이 때 돼지와 정을 거뒀다. 곧 바닥에 내려놓고는 말래 밑에서 찾아 미리 대기시켜놓은 도치(도끼)로 숨골을 사정없이 한번 때린다. 눈을 손으로 감싸고 보지 않았다. “꽤액~꽤액” 하다가 숨을 몰아쉰다. 바닥 흙이 날리고 돼지 눈은 흰 창만 보였다.

▲ 아이 키보다 더 큰 저울로 무게를 재기 힘들면 긴 말목을 끼워 뜨는 게 일상적이었답니다. 90kg 내외 돼지를 잡았답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곧바로 목을 짓누르고 여느 칼보다 훨씬 긴 무쇠 칼로 빈 대야를 받히고 멱을 딴다. 한번 푹 찌르더니 다시 빼서 조금 더 넓게 찔러 이리저리 길을 넓힌다. 칼을 약간 뺌과 동시에 “콸콸” 봇물 쏟아지듯 빨간 피가 쏟아져 나온다. 툭 튀어나온 코로도 핏물이 거품을 문다.

“성님 쐬주랑 소금 좀 넣읏쇼.”

‘아그들은 보지 마라’는 어른들 말씀에 뚤방 위에 올라서 지켜보고 있었다. 순대를 만들려면 굳지 않아야 한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선혈이 채 굳기 전에 굵은소금 두 줌과 소주 세 홉 정도를 부었다. 더디 나오자 다시 칼날을 집어넣어 고인 걸 더 받아낸다. 이제 돼지는 거의 힘이 다 빠진 상태다.

“그만 받어. 어서들 싣더라고.”

짚가마니를 깔고 손수레에 실어 냇가로 나갔다. 꽤나 무거운지 바퀴살이 일그러지기 직전이다. 뒤따르던 사람들은 칼을 두어 개 더 숫돌에 갈아서 나갔고 나는 소금과 소주, 깍쟁이, 막걸리주전자를 챙겨 핏방울이 떨어진 길을 따라 고샅길을 내려갔다. 벌써 어른들은 널찍한 바위를 말끔히 하고는 돼지를 내려놓았다.

“끓는 물 각고 온가? 식기 전에 해부러야헌디….”
“시방, 애기 엄씨가 각고오요.”

이윽고 잔치마다 늘 그렇듯 다리거리엔 구경꾼이 열두엇까지 불어났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 두 개에 담아 골고루 뿌린다. 한곳만 오래 부었다가는 살까지 익기도 하거니와 물을 또 가져와야 하니 닿지 않은 곳만 없게 실실 뿌리고 마는 것이다. 부족하다싶으면 한 번 더 거치면 까만 털이 홀라당 벗겨진다는 걸 누차 경험한 사람들이다.

▲ 명절 때 남자들 일은 대개 돼지잡는 일로 마감을 했습니다. 곡성군 오산면 어느 마을에서 이웃끼리 어울려 돼지를 잡고 있네요. 그 때 돼지는 비계도 맛있었습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옆에 있던 사람 셋은 볼이 넓은 국그릇과 복개로 털을 ‘쑥쑥’ 밀고 당긴다. 어찌된 영문인지 새까만 때와 함께 까만 털이 쏙쏙 잘도 벗겨진다.

칼잡이들 손놀림도 더 빨라졌다. 그릇 뚜껑이 지나간 자리를 날을 약간 기울여 “스윽슥” 면도질을 깔끔하게도 한다. 하얀 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북북” “슥슥” 소리가 엉켜있다. 그 즈음 발모가지 네 개가 떼어졌는데 돼지 기른 사람 몫이 되었다.

뒤집기를 반복해 밀고 당기고 양동이로 물을 끼얹고 면도질을 거듭한 끝에 헐벗은 돼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드디어 핏물이 질질 흐르던 목울대 근처를 기점으로 마샌은 대가리를 떼어내 한쪽에 놓는다. 짚수세미로 몇 번을 문지르고 물을 두어 번 끼얹었다.

개봉박두! 가장 날렵하고 잘든 칼을 골라 민들민들한 돌에 한쪽으로 “쓱쓱-” 반대쪽으로 “쓱쓱-싹” 문지르고 물에 한번 헹군다. 돼지를 배가 하늘로 향하게 반듯이 놓고 젖통이 주르르 줄을 선 배 쪽에 칼을 들이댄다.

위쪽에서 아래로 그어오매 “삭삭” 소리마저 들린다. 불알 근처까지 칼이 닿자 밥통과 염통, 허파, 간에 이어 큰창자, 작은창자, 이자, 지라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이 때 누린내가 확 풍겨왔다. 위에서 아래로 훑듯 내장을 꺼내자 병용이 아버지가 옆으로 다가온다.

“어이, 그거 나 주소.”
“쓸개 말여라우? 안 그려도 드릴라고 했어라우.”

▲ 쇠 갈고리가 아닌 지푸라기 겉잎을 뽑아 새끼줄을 짧게 꼬아 처마에 걸어둔 풍경이 그립습니다. 점방에서도 따로 한마리 잡았답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내장을 밖으로 꺼내자 친구 아버지는 내 주먹만 한 희뿌연 쓸개를 입에 쏘옥 넣고 소금 대여섯 개를 드신다. 언젠가 모르게 짚다발도 옆에 대령해 있다. 이제 내장과 살코기를 손질하는 두 편으로 나뉘어 작업을 한다.

내장에서 위를 따로 떼어 보(湺) 아래까지 가져가 먹었던 걸 죄다 털어내려 간 사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맨 먼저 간을 톡 잘라 도마에서 썰어나간다. 소금과 삼학소주(三鶴燒酒) 대병을 누가 벌써 챙겨놓았다.

핏물 흐르는 간에 소주 한잔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비위가 상하는 사람들은 소금 한 점을 집어먹기도 한다. 순식간에 딱 먹기 좋게 썰린 간이 바닥이 났다.

아이들 중에서 오늘은 우리집 돼지를 잡는지라 유일하게 혼자인 나는 늘 옆에서 언제 내게 그 한 입 넣어주나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데 연장자 몇 분을 챙겨드린 아버지는 잊지 않고 한 점 챙겨주셨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뿐이 아니다. 껍질이 붙은 비계를 한 점 잘라 주시니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육회를 맛보는 행운까지 얻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금을 세 조각 넣으니 간도 적당히 맞았다. 그릇에 소주를 가득 채워 두세 잔을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도 있다.

“아가, 요고 각고 집에 댕겨 오니라.”
“알았어라우. 근디 뭐다요?”
“지레여, 지라.”

빈혈이 만만찮던 나는 지라를 달고 살았다. 아니 동네에서 돼지만 잡으면 내 차지였다. 지푸라기 두 줄로 묶어준 지라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가 궁금하여 다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 앞다리를 둘로 나누고 갈비 부위를 다 발라냈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있는 부분은 두 쪽 합쳐야 한 근이 될까말까 하는 갈매기살(간막이살)입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내장이 빠진 몸통은 허깨비 같다. 목살과 앞다리, 갈빗대 부분, 뒷다리로 사등분 하는데 옆에선 물을 축여 새끼줄을 꼬느라 바쁘다.

“자, 목살이요.”
“그거, 두근!”
“띠기 쉽지 않은디라우. 서근으로 허싯쇼.”
“그려.”

“뒷다리로 반근만 띴쇼.”
“아따메, 아짐은 째까 지달리쇼.”

조금만 주문해서가 아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내려와야 장사도 쉬운 법이라 순서를 어긴 걸 나무란 것뿐이다. 어떻게든 한두 근은 필요한지라 되도록 갈비나 뼈가 없는 쪽을 골라 살코기부위를 선호했다. 앞쪽 끝나고 이어 뒷다리 부위에 붙은 살점을 잘라 판다.

옆에선 네 사람이 창자에 든 오물을 빼고 물을 부어 뒤집고 소금으로 빨래를 하느라 분주하다. 두 번 헹구더니 밀가루를 뿌려 주물럭거린다.

“어이, 박샌. 다 씼었으먼 댕겨오더라고.”
“안 글도 시방 나설참이요.”

▲ 피와 몇가지 채소를 잘게 썰어 섞은 뒤 말끔히 씻은 큰창자, 작은창자에 내용물을 집어넣고 짚으로 묶어서 끓을 때 대 침을 놓으면 터지지 않고 잘 삶아집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순대를 만들 참이다. 내장을 통에 담아 우리 집으로 간다. 평소 아버지는 고기는 끊이지 않게 하셨다. 큰댁에 드릴 것까지 갈비 쪽으로 아홉 근을 묵직하게 샀다. 반근이 서너 집, 한 근이 대중이고 두 근 이상을 사는 사람은 몇 집 안 되던 시절이다. 당시는 한 마리면 마을에 필요한 양이 되는 것이다.

그 때마다 댓 근 이상을 사오시니 푸주간이 아닌 우리집 처마엔 고기가 걸려 꼬들꼬들 마르면 소금독아지에 묻어두기도 했다. 칼끝으로 구멍을 뚫고 새끼줄을 끼워 다시 새끼를 꼬아 내게 건네셨다. 마냥 신이 나서 두 손으로 간신히 들고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선지와 김치, 콩나물대가리를 소금 간하여 창자에 밀어 넣어 진짜 피가 든 창자 순대, 피창순대를 정성으로 만드는 사이 일반 내장이 펄펄 끓어간다. 불을 보는 병문이 아버지가 맨 나중에 넣은 순대에 바람구멍을 놓자 터지지 않고 잘도 익어간다.

구수하고 진한 국물 맛이 온 동네를 쓸고 다녔다. 어머니는 밥을 한 솥 가득하셨다. 마당에 사각 멍석이 두 개가 깔리자 빗질 소리가 요란하다. 거의 다 팔렸는지 한 분 두 분 집이 북적거렸다.

▲ 내장을 삶고 순대를 넣어 끓여서 막 썰어서 먹는 맛이 일품이지요. 국물 뜨고 고깃점 넣고 밥을 말아 먹고 싶습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돼지 잡는 걸 구경하지 않던 이웃사촌들까지 모이니 마흔 명이 넘었다. 싸리채반에 건져서 큰 도마에 부위별로 뚝딱뚝딱 썰어 넓은 함지박에 담는다. 뭐 대단한 것도 차리지 않았지만 김치 하나에 순대와 내장을 큼직하게 썰어 옆옆이 놓고 국물 떠주면 밥 서너 숟가락 말아 먹는 간단한 차림이다.

남자 어른 몇 분만 상에 앉고 거개는 선 채, 쪼그려 앉은 채 둘둘 말아 먹는다. 몇 분은 소주를 몇 잔씩 드신다. 명절 때마다 그렇듯 동네잔치다. 진짜 대명절 앞에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몸보신을 하여야 차례와 수십 번 차려야하는 술상내기를 감당해낼 수 있었다.

“어, 잘 묵었다. 성수, 잘 묵었소. 인자 가봐야 쓰겄구먼….”
“남개떡, 잘 묵었구만.”

해름판이다. 추석 이틀 전 대목장까지 다 봤지만 전 부치고 생선 찌고 장만에 눈 코 뜰 새 없던 아주머니들이 먼저 빠져나가자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집을 비웠다.

그 와중에도 눈치 없는 몇 분은 마당에서 마루로 옮겨 술자리를 이어갔지만 명절이라 보기가 좋았다. 그날 밤 모든 일이 끝나고 돼지 값이 들어왔다. 추석이 끝나자 아버지와 나는 돼지불알을 된장에 풀고 생강을 듬뿍 넣어 푹 삶아 먹었다. 냄새도 없고 밤고구마처럼 포근포근한 맛이 났다.

▲ 참 맛나게 삶아졌네요. 전혀 질기지 않고 입맛을 당깁니다.
ⓒ 시골아이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고향신문 <시골아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시절 이야기가 고픈 분은 시골아이☜ 바로가기로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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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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