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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잘 지내던 한 후배가 새삼스레 전화를 했다.

"강 선생님, 긴 방학인데 뭐 하고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 00빌딩에 있는 00치과로 오이소. 이빨도 함 보고, 얼굴도 함 보옵시다."

금방 집히는 게 있었다. 말하자면 치과 판촉이었다. 요즘 한 빌딩에 하나꼴로 치과들이 비집고 들어서는 것을 볼 때 예견되기도 한 것이었다.

벌써 과잉공급이 시작된 걸까? 고객 입장에선 이런 고객유치가 나쁠 것은 없었다. 서비스는 물론 비용면에서도 그만큼 치과 문턱이 낮아질 수 있으니까.

@BRI@그 후배의 체면도 염두에 두었지만 쾌히 승낙했다. 마침 치과에 한번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요사이 양치질을 할 때 피도 맺히고 단단한 음식을 씹기도 예전 같지 않아 그 좋아하던 마른오징어도 멀리 하는 실정이니, 사실 나로서는 호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돈 문제가 머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가보면 이빨 녀석들이 돈 달라고 아우성을 칠 텐데…. 그리고 '임플란트'라는 것은 왜 그리 비싼지…. 중산층이라고 자부하는 나도 이렇게 꼬리를 내리는데 더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맛있게 먹을 기회는 줘야지…. 이런 고충들을 의료보험에서 다소나마 덜어줄 수 있는 날이 언제쯤 되려나.

치과에 가보니 나처럼 초청된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물론 평소 만나는 사람들도 와 있었다. 재미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삼십 만원이야."
"나는 이백이야."
"김형은 소형차, 박형은 중형차가 입에 들어 가야 해."
"그러니까 연비와 수리비가 비례하네!"


내 차례가 되었다. 나이가 육십 밑자리를 깔고 있는 나도 벌컥 겁이 났다. 허나 평소 씹는데 별 무리(?)가 없었던 터라 가벼운 처벌을 고대했다.

처음 본 최신식 시설로 간호사와 의사는 친절히 치아 상태를 체크해 나갔다. 진단 결과 후 견적이 나왔다. 예상밖이었다. 삼백만원이 넘었다. 기존에 치료한 것도 다시 손봐야 하고 앞으로 악화할 수 있는 것도 미리 조처해야 한단다. 방치를 했을 경우 뒤에 더 큰 우환이 온다나.

나로서는 이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은 쓸만할 텐데 벌써 바꾸고 손봐야 하다니. 물론 대비를 잘해야 나중 화를 피할 수 있다지만, 여기에서 아낌은 통하지 않는가?

치아치료도 요즘 사회의 낭비풍조를 따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일의 우선순위가 있는 법, 문득 가전제품이 생각났다. 집에 있는 오래된 TV, 냉장고… 이들은 좀 불편하고 삐걱거리지만 그래도 제 역할을 잘하고 있지 않은가. 좀 적은 견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틈새는 없는가?

물론 이 생각은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적 지출에서 비롯된 나의 억지일 수도 있다. 혹자는 '치아가 얼마나 중요한데 사람 인체를 TV와 비교하다니! 금강산도 식후경! 이 세상 풍미를 음미하려면 무엇보다 튼튼한 치아를 유지해야 해. 그러니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어쩔 수 없잖아'라고 할지도 모른다.

"치료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서는 안 되지."


의사의 이 말과 내 생각이 오가던 중 그 치과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한번 왕림하여 음악과 함께 카푸치노 커피 한잔 나누시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런 분위기의 메일이었다. 적극적인 대쉬(?)랄까?

그러던 중 내가 근무했던 학교출신의 한 제자가 동네에 치과를 개업했다는 소식을 들렸다. 그러나 막상 가려고 하니 갈등이 일어났다. 상대는 선의로 베풀겠지만 필요 이상의 이득을 보게 되면 개운하지 못할 텐데 하고. 그러나 거기서는 꼭 필요한 치료와 처방이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비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는 다행히 나를 알아보았다. 물론 친절하게 나의 현재 치아 상태와 치료 방법을 세세히 알려 주었다.

"선생님 치아는 연세에 비해 아주 양호한 편입니다. 현재로선 손 볼 데는 두어 군데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그때 오셔도 충분합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오늘은 '스켈링'만 하시고 일주일 후에 한 번만 더 오십시오."

그 제자의 친절한 배려에 한결 마음이 가뿐했다. 물론 은사라는 명분이 고려되었을 게다. 그래서 우리는 연(緣)을 찾아 모여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제자의 품행으로 보아 그런 연으로 나에게만 그 맞춤형 치료가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른 환자에도 모두 그렇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의술의 판단도 주도하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니 제자가 "선생님, 그 정도는 제가 그저 해드려야지요" 했다. 순간 또 당황해졌다. 그러나 고마운 뜻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따뜻한 배웅을 받으면서도 등 뒤가 허전했다.

다음 주에 올 때는 간호사들을 위해 '케이크를 사 와야지'하고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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