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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다. 각기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추석이다. 생활에 쫓겨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생활하던 사람들이 모처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가는 길에 시간과 경비를 쏟아부으며 수고로움을 마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가슴 속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다.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올해는 추석 연휴가 토요일 일요일과 맞닿아 있다. 주5일 근무를 감안하면 공식적으로 5일 동안의 연휴다.

명절 때만 되면 나오는 이야기. 주부들의 명절 준비에 따른 어려움이다. 남자들은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 즐겁게 보내는 데 여자들은 음식 준비와 반복되는 상차림으로 녹초가 된다.

추석에 앞서 연휴가 3일이니 주부들의 맘고생이 클 것은 당연지사. 고향으로 출발하는 날을 잡는데 한바탕 신경전이 일어날 것은 뻔하다. 하루라도 늦게 출발하고 싶은 아내와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남편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갖은 아양을 떨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빨리 출발하고자 하는 남편은 사뭇 애처롭기까지 하다.

뾰로통한 표정이지만 시장을 들락거리는 아내가 고맙다. 매번 손에는 보퉁이가 들려 있다. 며칠 보낼 준비물을 가방에 가득 꾸렸다. 출발이다. 무던히도 많은 자동차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참 좋을 텐데. 보따리가 많으니 나는 빼고….'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에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서울 사람들이 산골 오지까지 가면서 도로공사의 예상시간보다 더 많이 걸렸다고 호통치며 분풀이하겠는가?

"아야, 이번에는 빨리 올 수 있지? 요즘은 내가 다리가 아파 장보기가 어려우니 빨리 와라."

토요일 하루를 집에서 쉬고 일요일 아침 일찍 나섰다. 순천에서 영광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다. 자동차도 많지 않은데다 이번에 개통한 자동차 전용도로 덕에 막힘없이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툇마루에서 얼간이 배추를 다듬고 계셨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머니는 바쁘다. 오는 길을 되돌아 시장에 갔다.

한적했던 시골 장터는 그야말로 북적거리는 장터다. 장마당의 고추전을 임시 주차장으로 열어두었지만 중과부적으로 혼잡하다. 구부정한 할머니들이 아들 며느리를 앞세우고 말쑥한 승용차에서 당당히 내린다. 그리곤 이리저리 단골 가계를 찾아 제수 용품을 준비한다. 대처에선 손자 녀석 손에 이끌려 다니지만 시골 장터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길안내를 한다.

시장통의 좁고 시끌벅적한 골목에서 윗동네 아저씨도 만나고 아랫동네 할멈도 만난다. 아들 며느리를 소개하는 것이 개선장군 환영회 축사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진다. 시골 장터의 쇼핑 법은 도회지의 쇼핑과는 다르다. 고작 돼지고기 서너 근 사는 것이지만 그동안의 정리가 있는 법이다.

"이 집은 좀 비싸기는 해도 벌써 십수 년 단골잉게 갈아줘야되."

방앗간 풍경
 방앗간 풍경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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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모시 잎은 이미 곱게 씻어 놓았다. 시장가기 전에 불려놓았던 쌀과 설탕, 볶은 콩 등이 마루에 가득하다.

송편을 해야 한다. 이제 시장이 아니라 아랫마을 방앗간이 목적지다. 위아래 마을 노인들까지 합하여 두세 명이 작은 방앗간 손님이다. 방앗간 주인은 일흔이 다된 할머니. 구부정한 모습으로 능숙하게 기계들을 다룬다. 떡쌀을 빻고 빻은 떡쌀에 모시 잎을 섞었다. 작은 시골 방앗간은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한두 사람이 끝나면 시간에 맞춰 다음 사람이 온다.

한적한 시골 마을 골목엔 모처럼 들리는 아이들 소리와 자동차가 가득하다. 방앗간 기계가 소리를 내고 연방 오가는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가 강아지 짓는 소리와 섞여 요란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부지런을 떨었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내가 마주앉아 모처럼 함께 송편을 빚었다. '오순도순'이란 말이 실감난다. 아내도 기분이 좋은 눈치다. 해가 기울면서 동생 내외와 조카들이 들어온다. 송편이 익는 냄새가 나더니 이런저런 고소한 나물 냄새가 섞인다.

꽃무릇 꽃밭
 꽃무릇 꽃밭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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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바뀌고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멈췄다. 추석 먹을거리 준비가 끝났다. 조금 한가하다. TV에서는 추석 풍경을 전하느라 바쁘다. 귀향길 이야기를 하더니 명절 풍속이 바뀌고 있다며 관광지 풍경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미리 성묘를 끝내고 가족이 연휴를 즐기는 모습이다.

우리도 가자. 인근 불갑산 일원에서 꽃무릇(상사화) 축제가 한창이다. 추석 준비를 마친 일행을 채근해 불갑사에 들어섰다. 정말 오길 잘했다. 가족 단위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꽃무릇(상사화) 밭에 빠져있다. 꽃무릇이 붉은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꽃무릇은 상사화라고도 불리는데 잎이 먼저 나와 시든 다음 9월경에 꽃이 핀다. 잎과 꽃이 만날 수 없어 서로 그리워한다고 상사화라고 불린다.

한 스님의 애처로운 사랑이야기를 전설로 담고 있기도 하다. 스님의 신분으로 여인을 만날 수 없어 그리워하다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꽃을 절 앞마당에 심었는데 그 꽃이 잎과 꽃이 서로 교차하면서 피고 졌는데 이 꽃이 상사화라는 것이다.

상사화
 상사화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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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군락지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
 꽃무릇 군락지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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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불갑사
 영광불갑사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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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한의 나들이도 끝났다. 둘째 동생 가족이 도착했다. 군 복무 중인 아들과 조카, 중간고사 공부를 하겠다며 혼자 남은 둘째 녀석을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뽕나무 오디로 담근 술과 술상이 준비되었다. 한 순배 술잔이 돌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잔과 함께 돈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두어 순배 술잔이 돌자 아이들 공부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가 돌더니 드디어 신랑 타박이 시작된다. '가사에 손끝 하나 들여놓지 않는다'는 말을 시작으로 며느리들의 고발이 접수되고 어머니의 준엄한 판결은 계속된다.

"그러먼 못써. 다 힘든디 함께 해야제."

며느리들은 신이 났다. 시어머니 판결은 몽땅 편파적이다. 어찌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여지없이 호통이 날아들고 며느리들의 통쾌한 웃음이 이어진다. 어찌 버티겠는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데 어머니와 세 며느리의 수다에 아들 셋이서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할 수 없이 죄인, 아니 중죄인이 되어 술이나 따르는 수밖에…….

추석날 아침. 일어나보니 해가 중천이다. 속 쓰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차례 준비가 늦었다. 휑한 눈으로 부지런을 떨어보지만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이야기들이 감감하다.

차례가 끝나고 성묘를 다녀왔다. 피곤하다. 한숨 낮잠을 자고 나니 좀 풀린다. 동생들부터 처가로 출발했다. 다행히 사돈집들은 그리 멀리 않다. 하나 둘 출발하고 나니 집안이 휑하다. 어머니는 떡, 고춧가루, 참깨 등을 바리바리 싸신다. 쌀도 한 가마니 담아 어서 차에 실으라고 성화이시다.

여동생과 매제는 저녁쯤 도착한단다. 여동생을 집에서 맞으면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하다. 여동생을 기다리는 마음만큼 친정 식구를 그리는 아내의 마음도 클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꽃무릇은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핀다. 잎이 먼저 나서 시드는 올케라면 잎이 시든 후 피는 꽃은 시누이다. 그리움이 크면 미움도 커지는가? 우리네 이야기 속에 시누이와 올케의 애절한 다툼이 많은 것도 이런 그리움 때문일까?

처가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동안 계속되는 아내와 여동생의 정겨운 통화가 참으로 고맙다.

불갑사 뒷편 꽃무릇 군락지 옆의 저수지 풍경
 불갑사 뒷편 꽃무릇 군락지 옆의 저수지 풍경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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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한을 즐기는 어머니와 가족들
 망중한을 즐기는 어머니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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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석 풍경> 응모글



태그:#추석, #상사화, #꽃무릇, #시누이, #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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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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