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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앞에 초대형승용차가 한 대 섰다. 어제 밤늦게 도착하여 아랫집 할머니댁으로 들어가는 걸 봐서는 도시에 사는 아들네나 딸네가 시골 어머님 집을 찾아 온 듯하다. 어림짐작으로 삼천 시시는 됨직한 승용차다.

 

오늘 아침. 차에 맺힌 이슬을 닦아내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봤다.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의 신사와 새파란 청년이 그 큰 차를 정성스레 닦았다. 차의 앞뒤는 물론 아래 위를 살피고 걸레를 털어가며 골고루 닦았다. 시커먼 차는 아침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저 분은 하루 시작을 늘 저렇게 하겠지 싶다.

 

차종을 알 수 없고 설령 안다 해도 그런 차종이 어떤 사양을 갖춘 얼마짜리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못내 불편한 내 심기는 어쩌지를 못했다.

 

저 사람이 한 달에 책은 몇 권을 읽을까. 저 큰 차를 부리느라 놓치고 사는 것이 뭔지를 알까. 이 작은 시골 산길을 꽉 메우며 저 차를 몰고 올라오면서 좀 창피하긴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하루가 떠올랐다. 일어나기만 하면 컴퓨터부터 켜고 보는 내 하루의 첫 순간이 비교되면서 갑자기 의아해졌다. 어떤 게 흉 거리이고 어떤 게 칭찬 거리일까.

 

정해 둔 어머니 공양시간을 넘기기 일쑤인 내 컴퓨터 하기는 핑계까지 마련한다. 어머니가 다시 잠 드셨다든가 날이 좀 늦게 밝는다든가 하는 핑계들이다. 내가 컴퓨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아침밥을 조르지 못하는 눈치를 느끼면서도 나는 컴퓨터를 끄지 못한다.

 

눈만 뜨면 자동차부터 살피는 삶이나 눈만 뜨면 컴퓨터부터 켜는 삶은 그 목적과 동기가 어떻게 다르든 똑같이 매인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였다는 말보다 긴박(緊縛)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토지에 긴박된 농노는 장원 내에서 영주에 의해 한 묶음으로 취급된다. 이렇게 묶인 삶은 컴퓨터를 켜는 게 아니라, 자동차를 닦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부림을 당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제와 어제 이틀간 진행되는 ‘논개축제’ 행사표를 보면서 어머님을 모시고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졌고 이 좋은 기회를 나만 즐기기가 미안해 다섯 명의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셔도 좋다고.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고 간다만다 대꾸를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랑 논개사당 일대에서 이틀간 참 행복했다. 어제는 논개사당 앞 커다란 연못을 거닐 때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듣는 노래였다. 어머니는 노래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노래를 해 보라고 하면 모른다고 했다. 여자가 노래하거나 춤추는 것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부모로부터 닦달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가사도 분명한 노래를 여러 곡이나 불렀던 것이다.

 

즉흥적인 가사를 창작도 해내셨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참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네”라고 내가 혼잣말을 했었는데 어머니가 장단을 맞추시는 것이었다.

 

“산은 높고 물은 깊구나.”

 

나는 깜짝 놀랍고 기뻐서 즉흥 장단을 맞춰 드렸다.

 

“얼씨구우~”

 

어머니는 이때부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구름이요 물속에는 자동찰세.”

 

물을 보니 저쪽 공연장 도로 곁에 죽 세워 둔 자동차들이 거울 같은 호수에 비쳐 물속에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노래는 시조 장단이었다. 나도 흉내를 냈다.

 

“사람들도 많고 많네. 흥이 절로 나는구나”

 

나는 숨조차 죽이고 어머니의 노래가 아무 방해 받지 않고 다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죽고 나면 그만인데 무얼 그리 서두르나.”

 

“논밭 없애고 신작로 생길 때는 우리 모두 굶어 죽었구나 싶었는데 서울길도 도돌아 오게되니 세상 참 좋아졌네.”

“치마끈 잘라내서 사놓은 논밭인데 신작로가 웬말이냐. ** 세금 내 놓으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일제 시절에 불렀던 농촌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 같았다.

 

옛 노래뿐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다 어머님의 입을 거치면서 노래가 되었다.

 

어머니는 가로수에 걸린 행사 펼침막을 보고 즉석에서 흥얼거렸다.

 

“주논 개대 축제 하고오.”

‘주 논개 대 축제’라는 펼침막을 그렇게 장단을 넣어 읽은 것이다.

 

“수리조합 고상했네. 동개동개 돌로 잘도 쌓았네.”

 

그러고 보니 저수지 둘레로 돌로 쌓은 축성이 정교했다.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을 내 가족들은 단 한 람도 함께 하지 못했다. 삶이 뭔가에 ‘긴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컴퓨터를 켜는 것으로 시작되는 나의 하루나 아랫집 아들네가 승용차를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나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가릴 것이 아니듯이 무엇에 긴박되어 있느냐보다는 긴박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된다.

 

묶어 사는 삶은 종의 삶이다. 무엇에 묶이든. 그것이 선행이라 할지라도 묶어 산다면 종의 삶이요 천국을 만드는 역사라 해도 묶여 산다면 역시 종의 삶이리라.

 

무엇이 묶인 것이고 무엇이 안 묶인 것일까?


태그:#논개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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