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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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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장신구 '금',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

마치 묵시록의 지옥을 연상시키는 사진이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질 당시를 현대에 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깨에 무거운 흙더미를 메고 사다리를 두손과 두발을 이용해 올라가고 있는 브라질의 세라 페라다 금광 노동자들. 생존을 위해 브라질 금광에서 천 한 조각만을 몸에 두르고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 1만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우리 눈에 들어온다.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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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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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광경 같아 보이지만, 사실 불과 20년이 조금 넘은 사진들이다. 광산에는 기계도 없어서 사람들은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고 있다. 머리에 짐을 이어 옮기는 것을 보면 두 손을 써야만 올라올 수 있는 가파른 절벽으로 보인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60번씩 이렇게 오르내린다. 축구장 두배는 될 법한 깊은 웅덩이에서, 밟으면 곧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사다리에 매달려, 흙과 돌을 짊어지고 개미처럼 오르내리는 사람들. 금이란 인간을 돋보이게 장신구이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무거운 짐인 것만 같다.

아프리카에 간 경제학자, 펜 대신 사진기 들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

이 사진을 찍은 이는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일컬어지는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1944~ )이다. 삶의 무게에 눌리고 찌든, 빵 한조각을 위해 몸을 부수는 육체노동에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절제된 감정으로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살가도는 1944년 빈부격차가 심한 브라질 내륙지방 아이모레스(Aimorés)에서 태어났다. 아이모레스는 온갖 광물이 다 나오는 광산이라는 뜻인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주에 소재하고 있다.

미나스 제라이스는 포르투갈 식민 지배 초기부터 금을 비롯한 온갖 광물들이 채굴됐기 때문에 공동체의 붕괴와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자연파괴가 압축적으로 가장 잘 나타나는 지역이다. 앞서본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들이 이곳에서 촬영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살가도는 원래 경제학자였다. 상파울로 대학교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주 재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는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탄탄히 걷고 있었다. 1970년에 그가 아프리카 르완다로 간 것도, 세계은행을 위한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플랜테이션의 효율성을 평가하고 과잉생산에 대비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도록 조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여행은 결과적으로 그가 다른 인생으로 가게끔 안내한 계기가 됐다. 부인의 카메라를 빌려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그가 사진에 점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 그 이듬해부터 그는 국제커피협회에서 일을 했는데, 커피 재배를 돕기 위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가 가뭄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마침내 살가도는 경제학자로 보고서를 써서 그들의 참상을 알리는 것보다는 사진을 이용해 세상과 의사 소통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은 현실이 집적된 세계를 수천편의 글이나 말보다 더 잘 보여주는, 통역이나 번역이 필요 없는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경제학자였던 살가도가 펜 대신 사진기를 들고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사회의 주류 담론 밑에 숨겨진 억압과 착취, 기아와 빈곤, 일상으로서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현실을 사진으로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종속이론' 연구 활발한 상파울로 대학에서 공부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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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도의 마음을 움직인 현실은 그의 이웃들의 모습이었다. 앞서 본 금광노동자들의 사진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에는 살가도의 조국인 브라질을 비롯한 '제3세계' 민중의 피가 묻어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팔과 발만을 가지고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아올리던 원시적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제국주의 국가였던 서구열강은 장족의 발전을 해온 반면, 식민지 국가였던 제3세계 국가들은 발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살가도가 재현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살가도가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상파울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당시 남미에서는 제3세계의 저개발 원인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이때 가장 설득력을 얻었던 이론은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이다. 중심부의 착취로 인해 주변부가 가난하게 됐다는 논리를 펼치는 '종속이론'은 근대화 이론과는 상호대척점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가 수학했던 상파울로 대학교 경제학부는 종속이론의 활발한 토의와 확산의 무대였다.

1944년 전후 시작된 세계경제의 황금기는 고속성장과 경제적·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세계란 일반적으로 서유럽과 미국만을 지칭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세계적인 경제성장의 원천이었으면서도 성과의 분배에서는 철저히 소외됐다.

이들 국가들은 2차대전 이후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남은 식민지 유산 때문에 독자적 경제발전의 길을 봉쇄당하고 선진국의 원료공급지로 남게 된다. 수많은 귀중한 토지 및 광산은 서구 국가들의 손에 넘겨지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민중은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빵 몇조각을 받아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들이 게을러서 가난하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보라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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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특정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비참에 몰려 있는가. 그들은 노동하지 않는 게으른 자들인가. 아니다. 사진을 보라. 게으름이란 단어가 설 곳이 없다. 오히려 살가도는 육체적 한계를 넘나드는 힘든 노동이 역설적으로 삶의 비참으로 이어지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살가도는 경제학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사진을 통해 기존의 경제학과는 다른 경제학을 다른 방식으로 내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이윤과 경쟁과 생산성의 경제학이 아닌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의 경제학 말이다.

"전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사진은 '현재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작은 길이에요. 제 이야기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관한 오늘날 지구의 상황에 대한 일례들이죠."

무엇보다 살가도의 사진이 칭송받는 이유는 그가 피사체와의 관계를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살가도는 노동자의 삶을 촬영하면서 무려 3주 동안 그들의 생존 현장인 광산에 머물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했다고 한다. 또 기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헬지구를 촬영하기 위해 프랑스 지원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와 함께 15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을 사진에 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보도사진기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은 달랐다. 살가도는 "에티오피아의 한 난민촌 캠프에서 지낼 때 3~4주 사이에 40개가 넘는 텔레비전 보도진이 다녀갔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한 무리의 보도진은 정부에서 내어준 안락한 버스를 타고 와서는 사헬 지역의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기자를 한 명 만나 그곳의 사정을 대충 물어보고는 두 시간 후에는 취재를 마치고 그 버스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취재한 내용은 미국의 주요 텔레비전에서 뉴스로 방영되었죠."

타인의 고통이 또 하나의 볼거리로 전락하는 현실을 꿰뚫어 본 작가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세라 페라다의 금광, 파라, 브라질, 1986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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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도는 이런 접근방식으로는 현상 너머의 진실을 찾아내고,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고통을 동감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자신이 감수해야 할 개인적인 고통이 따르며, 또한 이를 감내하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쇼핑하듯이'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은 급하게 일정을 잡고, 비행기나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보이는 촬영거리들을 향해 급하게 셔터를 눌러댄다.

충분하게 보도거리를 찍었다고 느끼면 짐을 싸서 다시 급하게 돌아간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거래되기에, 이런 기아와 고통으로 인해 벌어지는 온갖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들도 주요한 거래품목 중의 하나로 전락되는 게 현실이었다. 인간의 고통이 또 하나의 볼거리로 전락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이다.

이 사진작가들은 사건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고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진에는 귀 기울일 만한 메시지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살가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진들은 세상을 바꾸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은 사진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촬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좋거나 나쁜 사진들이 만들어 집니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과 무고함을 증명해 주는, 뻔뻔한 혹은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관행인 타자적이고 우월적인 시선을 비판했다.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 (...)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살가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존중하고 기품있게 묘사하고자 했다. 살가도는 제3세계 원주민의 삶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일방적 시선과 동정에 그치지 않도록 사진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탄생한 '사헬, 고난속의 사람들'은 극심한 환경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고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만일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단순히 측은한 감정만을 느낀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 속의 사람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타인들이 아니라, 지구라는 같은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조금, 결국 미국 경제에만 도움

코렘캠프의 피난민들, 에티오피아, 1984
 코렘캠프의 피난민들, 에티오피아, 1984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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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4~1985년 사헬에서 사진을 찍으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유엔이나 세계의 유수의 자선단체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돕기 위해 원조금이 나오지만 온전히 그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기타 다른 잘 사는 나라로 다시 흘러 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예를 들어 국제기구에서 나온 기금 2천만 달러 중 1천2백만 달러는 미국의 농부에게 곡물 값으로 가고, 4백만 달러는 미국공군에게 운송비로 가게 되어 결국 미국 경제만 도움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그렇게 사들인 식량을 그렇게 빌린 헬기에 싣고 정작 국제난민들은 만나지도 않고 헬기 위에서 마치 베트남에 폭탄을 뿌려댔던 것처럼 투하했다. 살가도는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헬기로부터 뿌려지는 식량들을 보았다. 그리고 헬기의 조종사 혹은 그것을 뿌리라고 지시한 미국에겐 그 식량이 누구에게 잘 전달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또 이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장기적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땅에 떨어진 곡물을 주워 먹게 하여 일시적인 배고픔만 면하게 해주고, 그 생활에 익숙한 아프리카인의 자존심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살가도의 사진에 드러나는 피사체의 존엄성은 그가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작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한 사람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별의 사람들은 모두 동등합니다. 누구든 건강과 교육, 사회적 원조, 시민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만큼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 나는 보통사람들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에겐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에 의해서라기보단 참여의 손길을 내밀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항상 인지함에 의해서요.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현재와 같은 파국의 상황으로 미래를 몰고 가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 제 소망은 이런 상황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도움의 손길을 잡는 것입니다. 제 사진을 보러 온 사람과 보고 나서 나가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의 사진 보고 수천명의 의사와 간호사, 아프리카로 발길 돌려

한때 파지빈느 호수였던 곳,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말리, 1985
 한때 파지빈느 호수였던 곳,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말리, 1985
ⓒ 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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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사진들을 통해 삶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것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곳에서 태어나, 살고, 또 죽어가는 사람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의식을 일깨워 주고있다. 그의 사진이 발표된 후, 다른 언론이 취재했을 때와는 달리,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젊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에티오피아와 수단으로 발길을 돌린 점은 살가도 사진의 호소력을 방증한다.

그의 사진에는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선동 또는 호전적인 자기주장이 거의 없다. 대신 그가 사진 속에서 다루는 주제는 진지한 문제이며, 토론되어야 한다는 점을 환기 시킨다. 다시 그의 사진들을 보자. 그는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슬픈 현상들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없도록 쓸쓸하고 충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 '불편한 진실'이기에 처음에는 시선을 회피하게 만들지만, 잠시 후 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행동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을 요구하는 몸짓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황량하고 쓸쓸한 세계로 우리 소매를 잡고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알량한 풍요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에 대한 선택권을 빼앗긴 채 표류해야 하는 생존이 어떤 것인지를 사진 속 인물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특권이,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고 행동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공포와 피로 얼룩진 현실에 대해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것인가.

살가도의 사진들은 우리들에게 조용히 묻고 있다.


태그:#세바스티앙 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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