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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린 자를 위해 헌신하라는 예수의 교훈을 받들고 살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가 21일 오전 국민들 앞에 공개됐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올 1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작성된 40쪽 분량의 일기장에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 후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용산참사 등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이 일기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일면과 함께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자세와 고백이 담겨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찬미 예수 건강 백세' 등의 글귀에서는 위대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와 함께 사랑하는 아내와 건강을 걱정하는 소박한 한 노인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2009년 1월 1일
새해를 축하하는 세배객이 많았다. 수백 명. 10시간 동안 세배 받았다. 몹시 피곤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한편으로 독실한 천주교신자로서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써내려간 내용에서는 종교인보다 더 종교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2009년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눌린 자를 위해 헌신하라는 예수의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은 일기의 내용처럼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통해 진행된 납치와 사형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을 통해 드러난다. 김 전 대통령이 겪은 수난들은 십자가 처형만 빼면 어떤 면에서는 그가 섬긴 예수의 고난과 매우 유사하다.   

김 전 대통령의 삶과 예수의 고난을 비교하는 것은 죽은 자를 너무 띄우고 성인을 모독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겪은 일들을 살펴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예수는 자신들이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믿는 당시 기득권 세력인 성전권력에 대항하다 십자가에서 처형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권력자들이 보낸 밀정들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당했으며 결국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밤중에 강제로 납치당했다. 이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묘사된 것처럼 모질면서도 치욕적인 고문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원래의 세례명인 토마스에서 16세기 영국의 헨리 8세 때 신앙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토마스 모어의 삶을 따르기 위해 토마스 모어로 바꾸었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는 정치가이면서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도 최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해 르네상스시대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로부터 사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s, 박학다식한 사람)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권력에 맞서 신앙적 소신을 지켰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존되기도 했다.

그는 헨리 8세가 오직 왕자 생산을 위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영국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정신이상자에 가까웠던 헨리 8세는 국왕인 동시에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수장령(Supremacy Act)을 선포하면서 법을 스스로 제정하고 집행하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토마스 모어는 수장령은 신과 교회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기독교인에게 구속력이 없다면서 자신은 "국왕의 충실한 신하이지만 그보다 먼저 신의 충복이다"라고 선언했다. 서슬 퍼런 절대권력사회에서 반대는 죽음을 의미했고 토마스 모어는 당당하게 사형에 임했다. 그는 참수 직전 형리에게 "내 목이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라"고 말하는 한편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일이 없으니 자르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가진 인물이었다.

토마스 모어를 직접 자신의 세례명으로 삼을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김 전 대통령은 절대권력과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섰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이 통일을 얘기했지만 그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직접 몸과 마음으로 실천했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점에서 여타의 정치인과 달랐고 그것은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형제 폐지운동에도 참여

그는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천주교의 사형제 폐지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2007년 5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실은 특별기고문에서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누구도 이를 함부로 말살할 수 없다"고 전재하고 "나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간신히 살아난 바 있다. 이러한 경우 가장 기가 막힌 일은 재심에 의해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릴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나는 대통령으로 재임한 5년 동안 사형을 한 건도 집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신앙이나 민주인권에 대한 소신에 연유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형제 폐지 법안이 15, 16, 17대 국회에 걸쳐 계속 제출되어 왔다. 지금은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제안되어 있다. 하루 속히 논의를 통해 입법을 마무리 짓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국이 인권국가, 문명국가의 세계적 대열의 선두에 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것이다"면서 글을 맺었다.

그러나 한 정치인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순교자에 가까울 정도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한 반면 한국의 종교인들 중 이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은 매우 드물다. 김 전 대통령에 비교될 수 있는 종교인이 있다면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 정도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1901년~1989년)과 문익환 목사(1918년~1994년)는 60~80년대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독재에 저항하다가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이 기독교정신을 토대로 간디와 톨스토이를 잇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로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산 이상주의자였다면 문익환 목사는 필요하다면 정치인과도 손잡고 일할 수 있다는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킨 인물이다. 문익환 목사는 89년 3월 김구 선생처럼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한반도평화의 초석을 닦았다. 수구보수에게는 '빨갱이', 진보세력 일부에게는 공안정국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몸으로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난의 시대에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 같은 소수의 종교인들이 예언자적으로 살았다면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권력과 유착해 오히려 김 전 대통령을 '용공주의자', '지역주의자'로 몰아가면서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다. 천주교의 경우는 그나마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용감하게 맞섰지만 주류 개신교 등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종교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종교인의 사회참여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직자의 제사장적 임무 외에 민초들의 삶에 동참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예언자적 임무에 대해서는 애써 부인하고 독재에 기생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한 후 쓴 일기에는 엄혹했던 시기에 기득권에 안주하고 침묵했어도 무방할 만한 종교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이 어려울 때 아낌없이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흘러넘쳤다. 

2009년 2월 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1976년 명동성당 앞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투옥되자 직접 면회를 갔고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 구명활동을 하기도 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만델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김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매우 인색한 평가를 받았지만 해외에서는 생전에 이미 거인으로 존경받았다. 해외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에게 '한국의 만델라',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평가를 했지만 노벨 평화상 선정위원회 일부에서는 오히려 만델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하기도 했다. 남아공화국의 인종차별과 26년간의 수감생활로 세계적으로는 만델라가 더 주목받았지만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라는 무장․게릴라 단체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비폭력 평화운동을 한 김 전 대통령에게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퇴임을 앞둔 2003년 2월 중순 하르트무트 코쉭 한-독 의원 친선협회장 역시  <김대중과 만남>이라는 책을 발행해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이 책에는 요하네스 라우,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등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의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들이 기고했다. 권력의 자리에 물러나는 한 인물에 대해 독일의 저명인사들은 원고료도 받지 않고 기꺼이 김 전 대통령의 개혁성과 남북화해를 위해 기여한 공로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 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이지만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일관된 원칙을 세워놓고 꾸준히 추구해왔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 남한 내 일부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물질적 수단을 투입했다는 비난을 하고 있지만 과거 서독 정부도 동서독 관계를 완화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제 종교인 이상으로 숭고한 삶을 살았던 김 전 대통령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조기를 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하에서 자행되는 민주주의 유린과 남북관계 파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지켜보면서 온 국민에게 "국민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지만, 행동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손해 보니까, 시끄러우니까 양심을 잠재운다. 이래서 의롭게 싸워온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는 것"이라며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이것은 제가 마음으로부터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 것"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남은 자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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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대중,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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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백찬홍의 '종교로 세상읽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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