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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농촌은 밖에 나가서 눈만 크게 뜨면 보이는 것이 먹을 것이요, 돈거리다. 돈으로 보자면 돈이요 먹을거리로 보자면 먹을거리인 것들이 지천이다. 버려진 이것들이 날마다 밥값 걱정으로 태산을 쌓았다가 헐기를 반복하는 어머니에게는 아주 훌륭한 일거리가 되어준다.

 

그리하여 나, 하필 일기조차 몹시 불순한 날 어머니를 모시고 현장으로 나아갔다. 능률로만 치자면 어머니가 안 계시는 편이 훨씬 낫겠지만, 능률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밥값 걱정을 덜어내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 굳이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오매, 이것들이 다 뭐여? 무시 작업을 했는가 본디, 으째 사람도 없고 무시만 저렇게."

 

예상했던 바 그대로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바람이 어머니의 백발을 흩날리는데 얼핏 무협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하필 무협영화를 생각해낸 나 자신이 실없어서 피식, 피식 웃고 있는데 어머니는 상황파악이 영 안 된다는 듯 연거푸 "이것이 뭐여?"를 반복하신다.

 

"나는 지금부터 무를 주워다가 차에 실을 테니까 잉? 엄마는 무청을 따서 자루에 담으면 되는 거예요."

"아니 긍게 이것이 뭣이냐고."

"아이 참, 보면 몰라요? 무 밭이잖아. 가져갈 것 가져가고 남은 것들이라니까."

"오매 시상에, 이것들이 다 남은 것이라고?"

 

아니다. 틀렸다. 사실은 남은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들이다. 큰 것은 크다고 버리고, 작은 것은 작다고 버린다. 둥근 것은 둥글다고 버리고, 골이 파인 것은 골이 파였다고 버리며, 새끼를 친 것은 또한 새끼를 쳤다고 버린다. 사람으로 치자면 S라인에 미모 정갈한 것들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골라, 골라, 골라서 버린다.

 

이렇게 골라서 버린 것을 나는, 우리는, 그야말로 골라, 골라, 골라서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아무 것이나 그냥 주워 담아도 되겠지만, S라인에 미모 반듯한 것들만을 골라서 싣는다고 트럭이 종횡무진 무를 으깨고 다녀버린 까닭에 상처 난 것들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고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매년 반복되는, 이를테면 연례행사일 뿐이다. 이런 황당한 연례행사의 고리를 끊어낼 만한 비책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세세년년 대통령을 해도 장기집권 어쩌고 하는 비판으로부터 자유스러울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물을 제대로 완벽하게 다스리는 자가 현군이요 덕군으로 칭송을 받았다지 아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물이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 농산물 관리를 제대로 완벽하게 해내는 일이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어떤 정치인도 농산물 관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관심을 집중하지도 않거니와 대대적인 투자를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문제가 불거지면 그제야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걱정스럽다, 우려스럽다,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는 하지만 카메라에 전원이 꺼지고 기자들이 떠나면 이제 됐다 하고 잊어버린다. 그러니 기껏 개발했다고 내놓는 정책이 폐기처분이요 생산비 보전이라는 두 단어일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서 생산비 보전이지 이백 평 한 마지로 따져 삼십몇 만 원이라니까 따지고 든다면 씨앗 값이나 겨우 될까 말까한 금액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개인이 씨앗을 받았다가 다음 해 심고, 또 심고 그러는 영농이 아니라 다국적기업에서 공급하는 씨앗을 거의 강제적으로 구입해서 사용하다 보니 씨앗값이 거름값에 맞서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쨌든 금년에도 배추와 무 십만 톤을 폐기처분한다는 단발성 정책이 발표되었다. 무지막지하게 그냥 갈아엎을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거둬들여서 다른 데 준다는 생각은 해볼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르는 생각을 주섬주섬 머릿속에 넣어보기도 하면서 어쨌든 나는, 우리는 버려진 무를 줍고 무청을 줍는다. 이렇게 주운 무청을 짚으로 엮어서 생으로도 말리고, 연탄불에 푹 삶아서도 말리고, 이런저런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마구마구 말릴 예정이다.

 

그러면 무청만 그렇게 말리느냐. 아니다. 무도 일부는 땅을 파서 묻고, 일부는 동치미에 깍두기에 온갖 김치를 담그고, 그러고도 남는 것들은 칼로 잘게 썰어서 무말랭이로 말린다. 말리고 또 말리고, 오늘도 말리고 내일도 말린다. 이렇게 끝없이 말려서 뭐하냐고? 글쎄 뭐, 어디 줄 사람 있으면 주기도 하고, 어디 팔 데 있으면 팔기도 하고, 먹을 일 있으면 먹기도 하고 뭐 대충 그런 답이 나오지 않겠나 싶은데, 어쨌든 일단은 말리고 본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은 여기서도 필요하다. 이 계절이 지나면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 무청이요 무말랭이인 것이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2인승 미니밴으로 한가득 무와 무청이 들어찼다. 이 정도면 어머니가 최소한 보름 정도는 밥값 걱정으로 한숨 쉴 필요가 없을 만큼의 일거리가 되겠다 싶은데, 그런데 어머니는 일어날 줄을 모른다. 이제 그만 가자고 어깨를 부축해서 일으키려고 하면 "이것 하나만 더" 하시고, 그것 하나 정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제 갑시다, 하면 다시 또 "이것 하나만"하신다.

 

"아따 참말로 환장하겠네.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요오."

"으찌케 그냥 가아?"

"아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이것 하나만 더 실어."

"이것 하나 싣고 나면 또 저것 하나만 더 실어, 이럴 것 아녀?"

"죄로 가. 벌 받는당게."

"에?"

"사람이 먹는 것을 사람이 먹어야제. 이러믄 죄로 가는 것이여."

 

먹을 것을 버리면 벌 받는다. 어렸을 때 숱하게 듣던 말이다. 외할머니께서 특히 그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 외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왜 죄로 가야 하는가? 내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 갑자기 문제가 심각해진다. 내가 아무리 잘못 없다고 증거를 수백 가지 내놓는다 해도, 최소한 보고도 못본 척했다는 죄는 남을 것 같다는 느닷없는 불안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와, 미치겠다 이거. 죄를 짓지 않으려면, 벌을 받지 않으려면 커다란 트럭이라도 끌고 와서 무를 다 실어야만 할 것이다. 트럭도 한두 대로는 어림도 없다. 어머니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렇지만 옳다고 보기도 어렵다. 뭐냐 이거. 무슨 이런 이상한 문제가 다 있는 것이냔 말이다.

 

너무나도 어이없게, 너무나도 터무니없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죄인이 되어버린 나, 머릿속이 하얗다는 느낌인 채로 한참이나 멍청하게 서서 널따란 무밭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니 문득문득 주마등 같은 생각들이 휙휙 지나간다.

 

아, 보면 볼수록 정말이지 미치겠다. 이 바다처럼 널따란 밭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뛰다가 아무 데나 쪼그리고 앉아 무를 줍고 무청을 줍는, 이런 신나는 체험학습은 어째서 아직도 없는지 모르겠다. 갯벌체험학습을 한다고 특별 제작한 경운기를 타고 들어가서 조개들을 경운기 바퀴에 몰살시키는 체험학습은 곧잘 하면서도 이런 생산적인 체험학습 프로그램은 어째서 없는 것이냐 응?

 

희망근로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 괜히 하는 일도 없이 거리에서 어느적거리게 할 것이 아니라 버려진 무를 줍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 어렸을 때, 쌀도 보리도 다 모자라던 그 시기에 겨울이면 무밥을 해먹곤 했었다. 무를 채썰어서 쌀과 섞어 밥을 하면 밥이 달고도 시원했다.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기아에 허덕인다고 하는데, 아니 뭐 세계까지 갈 것도 없이 북한만 해도 그렇다고 하는데, 희망근로에 참가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희망 비슷한 것이라도 가져볼 수 있게끔, 저렇게 버려진 무를 주워서 어떻게 활용할 방법을 찾아보는 노력을 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발상의 전환, 발상의 전환, 앵무새처럼 되뇌는 그놈의 발상전환을 이런 데서 좀 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아 이거 참 뭐가 뭔지 모르겠다. 별 다른 생각 없이, 무와 무청을 줍겠다는 그런 아주 소박한 생각 하나만 가지고 나섰던 길이 아주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이렇게도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신다. 생각하는 동물이 되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겨우 어떻게 달래서 차에 타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한 번 더 돌아서서 "아이고, 저것들을 어찌하까" 하고 혀를 차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있는 무 하나를 가리키며 "저것 하나만 더" 하신다. 누가 말리랴. 이런 어머니를.

 


태그:#농촌의 오늘 , #죄와벌, #발상의전환, #못 말리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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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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