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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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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의 저서를 처음 접한 때는 고등학생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어제 본 것처럼 기억나는 책, 바로 <김약국의 딸들>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처럼 경제력은 있지만 한없이 냉정한 아버지와 그 남편을 마음 놓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딸들이 겪어내는 일상사. 그 비극적인 설정이 하도 인상 깊어 오랫동안 내용을 잊지 못했던 책이다.

하여튼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알게 된 여류작가 박경리 선생은 내 평생의 우상이었다. <파시> <시장과 전장> 그리고 마침내 장편대하소설 <토지>까지 챙겨 읽었다. 책이 아니라 영화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누우면 천장에 <토지>의 여러 인물들이 마치 활동사진처럼 스칠 정도였으니. 

세상에 이렇게 유려한 문장으로 물 흐르듯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 수 있는 위대한 필력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존경스럽고 부러워서 마치 짝사랑하듯 그 이름 석자를 내 가슴에 꼭꼭 박아두고 그 양반의 근황에 늘 관심을 기울였던 추억이 있다.

박경리 선생의 부음을 듣고 아깝고 가슴 아팠다. 연세로 보자면 천수를 충분히 누리신 분이건만 이제 더이상 그 분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기 때문이다. 선생이 묻히신 묘소 참배라도 하고 싶어 통영 나들이를 계획할 즈음 뜬금없이 후배가 선생의 유고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책을 들고 찾아왔다.

언니가 제일 좋아할 것 같아서 사왔다는 후배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선생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다. 나이가 가르치는 것일까? 왜 그 말이 그렇게 정겹게 들리던지. 그리고 첫 장을 열었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 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가난과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생을 뒤돌아 보며 세상과의 이별 준비를 마치신 선생님의 독백이 울림처럼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더불어 이제 이 양반이 평화와 안식을 얻으셨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주책없이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글도 읽어야겠고 눈물은 그치지 않고, 훌쩍훌쩍 들이 마시며, 손등으로 훔치며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니 밥 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짧은 산문 같은 시집. 따님 김영주 선생이 쓴 서문에 그런 말이 있었다. 언제나 당신에게 엄격했던 어머니. 수십 장, 수백 장의 파지를 내시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셨던 분이었는데 이번 시들은 그다지 고치시지도 않고 물 흐르듯 써내셨다고 말이다. 시 '옛날의 그 집'에도 선생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1장에서 4장까지. 페이지 수로 말하면 1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책자다. 일사천리로 읽어 젖히면 채 1시간도 안 걸릴 내용이지만 그 속에 꽉 찬 선생님의 모든 것. 유년에서부터 노년까지 선생의 80평생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있다.

제 2장 어머니에서는 너무나 가까워 애증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모녀 사이를 마치 내 속처럼 집어내셨다. 박경리 선생도 어머니 생전엔 참으로 불효 막심한 딸이었다고 고백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꿈 속에서조차 찾아 헤매었건만 번번이 못 만나 눈을 뜨면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아팠다고 했다.

수십 권 장단편 소설, 수필 속에 수시로 녹아 있었지만 박경리 선생의 자전적 모습이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진솔하게 그려진 책은 아마 선생의 마지막 시어, 그 행간에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이 유일한 것 같다. 선생의 체취가 묻어나는 책. 내가 아끼는 최고의 책으로 손꼽는데 무슨 망설임이 있을까.

선생의 삶과 철학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 환경…. 선생이 아파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우주의 모든 것이 녹아있는 책.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선생의 담백했던 평소 사진들과 함께 유언처럼 우리에게 남겨 준 그 한 마디는 생각날 때마다 들쳐 보아도 여전히 내 가슴을 울리고 만다.

덧붙이는 글 | 10년 최고의 책 응모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2008)


태그:#10주년 최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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