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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지만 즉위하지 못하고 요절한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곳. 정자각은 무너지고 주춧돌만 남아있고 사초지는 함몰되어 있다.
▲ 소경원 심양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지만 즉위하지 못하고 요절한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곳. 정자각은 무너지고 주춧돌만 남아있고 사초지는 함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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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부엉이 소리는 으스스하다. 어미를 잡아먹는 불효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기분 나쁘다.  글깨나 읽은 선비들은 고양이 얼굴을 닮은 매라 하여 묘두응(猫頭鷹)이라 불렀지만 민초들은 소리 그대로 부헝이라 불렀다.

"전하! 지난 소현세자의 장례일에 강문명이 지관 최남을 찾아가 '자오(子午)가 충돌하니 그대로 묘를 쓰면 원손에게 해가 될 것이니 책임을 져라' 겁박했다 하옵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할아버지와 손자가 가깝습니까? 조카와 외삼촌이 가깝습니까? 전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으리라고 지놈이 뭔데 감 놔라 배 놔라 한답니까?"
"건방진 놈 이로고!"
"그런 놈은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버릇을 고쳐주다 뿐이냐."

또 다시 부엉이가 울었다. 이번에는 부엉이계의 싸움꾼 수리부엉이다. 부엉이는 쇠부엉이도 있고 솔부엉이도 있지만 수리부엉이가 단연 돋보이는 맹금이다. 쇠 부엉이가 사냥을 했어도 수리부엉이가 다가가면 먹이를 놔두고 자리를 피한다. 이들의 위계질서다.

대궐이 뚫렸다, 경계망이 이리 허술해도 된다는 말이냐?

"전하! 지난밤에 대비전 나인이 담장을 넘어 나갔다고 하옵니다."
"뭣이라고?"
인조는 경악했다.

"여자가 넘어 나가는 담장이라면 불한당인들 넘어오지 못하겠습니까? 무섭습니다."
"으으음."

인조가 신음을 토해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쉽게 넘어올 수 있는 궁궐 담장이지 않은가. 불안했다.

"불러내는 세력이 있을 터인데 두렵습니다."

소의 조씨가 인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으으윽!"
인조의 입속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전하, 그렇다고 이렇게 주저앉으면 어떡합니까? 난 몰라"

소의 조씨가 인조의 배꼽아래에서 손을 빼며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 몰라요."
소의 조씨가 인조의 품속을 파고들며 도리질을 쳤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이튿날, 인조가 금부도사와 병조판서를 호출했다. 권력기관 수장을 동시에 불러들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지난밤, 궁궐에서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증좌다.

세자빈의 동기들을 먼곳에 부처하라

"강문명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양남(兩南)에 배소를 정해 안치하고 있습니다."

금부도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중죄인에게 남도라니 당치않다. 강문성은 제주에, 강문명은 진도에, 감문두는 흡곡에, 강문벽은 평해에 나누어 정배하라."

이들은 세자빈 강씨의 오빠와 남동생들이다.

"도사는 뭘 하고 있느냐? 즉각 시행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금부도사가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담장
▲ 궁궐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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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 담장이 이리 낮아도 되느냐?"

인조가 병조판서를 쏘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지난밤에 궁녀가 담을 타고 넘어갔다 한다."

"네에?"

놀란 병조판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궁녀가 담을 타고 넘어간 것도 중차대한 사건이지만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는 인조의 정보망에 기겁했다. 이 정도 정보망이라면 어제 밤에 기생 끼고 술 마신 것도 알고 있단 말인가? 두려웠다.

"이러한 사실을 병판이 모르고 있다면 누가 알아야 하느냐?"
"진상을 조사하여 즉시 상달하겠습니다."
"일각(一刻) 이내에 아뢰어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일각이라면 한식경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병조판서가 남색 관복에 바람을 일으키며 편전을 빠져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병조판서가 천익(天翼)을 펄럭이며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동소위 부장과 순경위 부장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넘어갈 적에 서로 마주 치지 않았으므로 사세상 알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경복궁 경비는 서소위(西所衛)  부장이, 동궐 경비는 동소위(東所衛)  부장이 맡고 있었다.

"그럼 누가 알고 있는가?"
"바깥 여막에서 지키고 있던 군졸들도 모두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알고 있단 말인가?"

인조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인이 담을 넘어간 일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인데 제때에 발각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매우 중대합니다. 해당 순라위 부장과 요령장(搖鈴將)을 중벌로 추고하소서."
"그들만 처벌해서 되겠는가?"
"포도대장도 벌을 받아야 하나 대장은 죄인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잡아들인 다음에 포도대장을 처벌하고, 그 다음엔?"

병조판서를 노려보았다. '바로 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지금 개를 삶아 먹느냐? 토끼사냥을 한 후에 가마솥에 넣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 순간 인조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문후를 여쭈러 궁에 들어가면 선조가 선대왕의 말씀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맑은 물에서 건진 물고기는 가시가 많다."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상심한 명종은 배다른 동생 덕흥군의 아들 이균을 가끔 궁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을 내주며 말동무를 했다. 이 와중에 하는 말이 '선왕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깨끗한 신하는 부리기 어렵더라'는 것이다. 조광조를 두고 한 말이다. 중종은 조광조 때문에 힘들어 했다. 도덕성을 갖춘 신하는 군주에게 당당했다. 국사를 집행하는데 한 점 의혹이 없고 깨끗했기에 임금을 가르치려 들었다. 중종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래도 일국의 국왕인데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려 들다니…."

자존심 상한 중종은 결국 조광조를 내쳤다. 결론은 약간 흠결이 있는 부하가 다루기도 쉽고 부리기도 좋더라는 것이다. 이 교훈은 비결이 되어 왕실에 은밀히 비전되었다.

병조판서는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이 따가움을 느꼈다.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목을 내놓으라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지휘계통상 포도대장은 병조판서의 부하다.

"나인이 담장을 넘어간 데에는 반드시 외인과 내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판을 크게 벌여야 살아날 구멍이 있다.

"그래서?"
"포도청으로 하여금 추적 체포하여 철저히 국문하게 하소서."
"모두 잡아다가 추국하도록 하라."

인조의 명이 떨어졌다. 임금이 엮었는지 약점 있는 신하를 부리기로 마음먹었는지 알 수 없다. 고도의 수 싸움이다.

덧붙이는 글 | 양남(兩南)-전남과 경남
일각(一刻)-15분
한식경-한 끼 식사 시간. 약 30분
천익(天翼)-무신의 공복. 철릭이라고도 불리며 당상관은 남색, 당하관은 홍색이다.



태그:#선조, #소현세자, #병조판서, #토사구팽,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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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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