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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침전이다
▲ 통명전 왕비의 침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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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뒷산 매봉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부엉이 소리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아니라 저승사자의 콧노래처럼 음산하다. 이 새가 동네를 향하여 울면 그 마을의 한 집이 상을 당한다고 여겼다. 흉조가 대궐을 향하여 울어대니 궁궐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신년 하례가 얼마 지나지 않은 정월 초사흘. 임금이 대신과 판윤을 불러들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청나라 사람들과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였다."

폭탄 발언이다. 사실이라면 역모에 해당한다. 정말이라면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체 입궐한 대소신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강빈은 용무늬가 들어간 홍금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았었다."

적의(翟衣)는 왕후와 세자빈의 대례복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홍금(紅錦)이다. 붉은 비단으로 지은 대례복은 왕후만이 입을 수 있고 세자빈은 아청색이다. 또한 왕후의 소매 끝 도련은 운용문을 넣고 세자빈은 운봉문을 넣는다. 헌데 강빈의 대례복 도련에 용무늬를 넣었다는 것이다.

"강빈은 자신의 거처를 빈전(嬪殿)이라 칭했으며 세자의 집무실을 동전(東殿)이라 부르도록 했다."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그렇게 부르도록 한 것은 빈궁마마의 하명이 아니라 아랫것들이 스스로 높여 불렀으며 특히 청나라 관리들이 심양관을 방문했을 때는 가함대신들도 일부러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경여가 진언했다. 비록 볼모생활이지만 청나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경여는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가 인질생활을 하다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강골이다.

"듣기 싫다. 소현이 죽은 후에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드러내는가 하면 이유 없이 화를 내고 문안하는 예까지도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마저 끊고자 함이니 묵과 할 수 없다. 강씨의 문 밖 출입을 금하라. 또한 강씨를 찾아가 말을 나누는 자는 엄히 다스리겠다."

어간에 강빈에서 강씨로 추락했다. 사실상의 연금령이다. 승정원으로부터 전지(傳旨)를 받은 강빈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삭풍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홀로 있는 느낌이었다

"전하! 마른하늘에 이러한 날벼락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적의(翟衣)는 저들이 책봉식에 입으라고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붉은색은 저들이 우리의 왕실 법도를 잘못 이해하여 벌어진 실수입니다. 전하! 저와 세자 저하는 한 번의 책봉식으로 족합니다. 저들의 강요를 거절하지 못하고 책봉식을 다시 올릴 때, 찢어지는 가슴 가눌 길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두 번 책봉식을 가졌다. 호란 전, 한성에서 거행한 책봉식은 명나라의 고명을 받았고 심양에 끌려와 청나라의 강요로 또 한 번의 세자 책봉식을 행했다.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니 명나라의 고명을 폐기하고 청나라 황제가 내려주는 고명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때 청나라 예부에서 만들어준 옷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전하! 문후를 여쭙지 못한 것은 세자 저하 상례를 치르면서 심신이 허약해져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몸이 조금은 추스러졌기에 문후 여쭈려 하던 참인데 청천벽력이십니다."

북경에서 한성까지 장장 3천리를 건강하게 귀국했던 소현. 서른세 살 청년의 몸으로 발병 3일 만에 숨을 거둔 세자. 눈, 코, 입, 등 아홉 구멍에서 선혈이 낭자했던 시신. 6개월이 소요되는 국장임에도 45일 만에 뚝딱 해치우는 장례. 강빈은 몸과 마음이 혼란스럽고 정신 줄을 놓기 직전이었다.

"저하! 저하 가신지 이제 8개월입니다. 저하의 승하도 억울 하온데 또 다시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저하!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첩을 지켜주소서."

외로움이 밀려왔다. 심양에 끌려가 인질생활을 할 때에도 지아비가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우의정에 오른 아버지가 있었고 출사한 남동생들이 있었기에 든든했다. 허나, 이제는 아무도 없다. 세자는 요절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남동생들 또한 먼 곳에 귀양 가 있다. 삭풍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홀로 있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속에 소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자관에 입주하던 날의 모습이었다. '저들이 지어준 견고한 집에 들어가면 귀국 날자가 멀어지지 않겠습니까?'라는 노파심을 표출하자 '돌아갈 날이 곧 돌아 올 것이니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립시다'라며 손을 꼬옥 잡아주던 의젓한 모습이었다.

"희망? 지금 이 순간 나에겐 무엇이 희망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 무엇 하나 희망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절망 뿐, 밝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강빈은 석철, 석린, 석견 세 아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이 모습을 몰래 엿보던 여인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오른쪽 건물이 양화당이다.
▲ 통명전 오른쪽 건물이 양화당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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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왕자를 생산하라고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사용했으나 승하 후 한동안 비어 있었다. 난리를 겪으며 궁궐 전각이 불타고 어수선한 틈을 타 소용 조씨가 슬그머니 입주했다. 임금이 통명전 옆 양화당에 상주하고 있으니 임금을 모시는 후궁으로서 임금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법도에 어긋났지만 누구 하나 의의를 제기 한 자가 없었다.

임금이 열네 살 어린 처녀를 간택하여 새장가를 들었다. 장렬왕후다. 왕비가 통명전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경덕궁에 나가있다. 소의 조씨가 밀어낸 것이다. 내명부에 명실공히 왕비가 있고 세자빈이 있지만 조씨의 위세에 눌려있다. 수장이 있지만 수장 노릇을 못하고 있다.

궁중에도 저자와 같이 통행금지가 있다. 어쩌면 더 엄격하다. 종소리가 28번 인정을 알리면 인적이 끊어지고 이른 새벽 33번의 북소리가 파루를 알리면 물 긷는 노복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후궁전 나인들에겐 통금이 없었다. 아니, 남들이 다니지 않는 이시간이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간이다.

동궁을 빠져나와 후궁전을 향하여 날렵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여인이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맞은편 어둠속에서 검은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죽이고 있던 여인이 튀어나갔다.

"향옥아! 어디 가니?"
무심코 가던 여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 깜딱이야. 애란이구나. 어디 갔다 오는 거니?"
상대의 신분을 확인한 향옥이 호들갑을 떨었다.

"응, 동궁전에서 귀동냥하고 오는 길이야."
"귀동냥이라니?"
"이 기집애는 다 알면서…."
서로 손을 부여잡고 까르르 웃었다.

"넌 어디 가니?"
"어주방에."
"어주방(御廚房)엔 왜?"
"소의 마마의 심부름."
"그래, 잘 갔다 와."
"잘 가."
헤어진 그녀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습을 매봉에서 후원으로 날아온 부엉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가함대신=호종대신
아청색(鴉靑色)-까치 깃털 색
운용문(雲龍紋)-용과 구름이 들어간 문양
운봉문(雲鳳紋)
어주방(御廚房)=임금님의 식사를 담당하는 주방, 수랏간



태그:#통명전, #어주방, #부엉이, #중궁전, #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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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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