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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다섯 번째, 이번엔 광주·전남·전북입니다. [편집자말]
1944년 6월 초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기숙사에 도착하는 광주전남지역 근로정신대 대원들.
▲ 일본 나고야에 도착하는 근로정신대 어린 소녀들, 1944년 6월 초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기숙사에 도착하는 광주전남지역 근로정신대 대원들.
ⓒ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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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학교에서 동생이 오더니 6학년 때 담임선생인 오가끼 선생이 찾는다는 거예요. 무슨 취직를 알아봐 주려고 그러나, 하고 내심 생각했죠"

김성주(83. 경기도 안양시) 할머니가 동생에게 연락을 받고 일본인 담임선생을 찾아간 것은 1944년 5월께.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사 일을 돕던 중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 집안에 어른은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없을 때였다.

"일본에 가라는 거예요.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도 보내주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학교 다니고 언니 볼 줄 알았는데..."

아직 철모르던 시절 일본인 담임선생의 말만 듣고 나선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에서 뽑힌 150여 명, 대전 충남지역에서 동원된 150여 명 소녀들의 나이는 불과 13~15세. 심지어 양금덕 할머니(83. 광주)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간 얼마 뒤 미쓰비시로 동원됐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공업도시 나고야. 대표적인 군수업체인 미쓰비시중공업은 당시 군용 정찰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온 근로정신대 어린 소녀들이 여자근로정신대라고 표기된 깃발을 들고 나고야시 아츠타 신사 참배에 나선 모습. 1944년 6월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온 근로정신대 어린 소녀들이 여자근로정신대라고 표기된 깃발을 들고 나고야시 아츠타 신사 참배에 나선 모습. 1944년 6월께.
ⓒ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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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기다리는 건 책상과 노트가 아니었다. 하루 10시간 가까운 혹독한 강제노동도 모자라 임금까지 착취했다. 특히 배고픔이 문제였다. 주어진 것은 콩비지 섞은 밥에, 겨우 단무지 몇 조각이나 시래기도 없는 된장국이 전부였다.

언니가 일본으로 떠난 뒤, 동생 김정주 할머니(81. 서울)가 오카기 선생의 부름을 받은 것은 순천 남초등학교 졸업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45년 2월이었다. 만 13살.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엄마도 안 계시고, 엄마처럼 따르던 언니마저 없던 차에 저도 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공부도 할 수 있고, 언니랑 같이 지내다가 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건데…."

미처 졸업장도 손에 쥐지 못하고 떠난 일본 길.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언니가 있는 나고야가 아니라 나고야에서도 300km 이상 떨어진 도야마의 한 공장이었다.

"유괴한 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공장 담은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고, 도망가려고 해도 어디 돈이 있어야 도망을 가죠. 지금에야 우리가 있었던 곳이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인 줄이나 알지, 어린 애들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데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요" 

공장에서의 생활은 어땠을까.

"선반 일을 맡기는데, 키가 작다보니 사과궤짝 2개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일했어요. 하루 정해진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밥도 없었어요. 중대 소대원까지 일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붙잡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한 사람이 끝날 때까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어린 소녀들이 일본인 한 감독관으로부터 지시사항을 듣고 있다. 맨 왼쪽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직 앳된 표정의 한 소녀 얼굴이 오히려 더 애처롭게 보인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어린 소녀들이 일본인 한 감독관으로부터 지시사항을 듣고 있다. 맨 왼쪽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직 앳된 표정의 한 소녀 얼굴이 오히려 더 애처롭게 보인다.
ⓒ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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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역도 노역이지만 가장 큰 공포는 미군의 폭격이었다. 전세가 밀리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B-29의 폭격이 시작됐다. 특히 군수공장은 주요 목표물이었다.

"잠을 잘 때도 신발을 그대로 신고 옷도 그대로 입고 잤어요. 사이렌이 울리면 불덩어리를 피해 논으로 산으로 뛰다 넘어진 사람도 있고, 시궁창으로도 빠진 사람도 있고. 그렇게 밤새 피해 다니다 들어와도 잠 한 숨 안 재우고 다시 공장으로 보내는 거예요"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 순천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라는 손가락질이 시작됐다.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혼처를 놓치는 것은 예삿일이고, 설령 어렵게 결혼을 했더라도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됐나요?"

"한 번은 밖에서 남편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예요. 일본에 가서 그동안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고…."

김성주 할머니가 남편한테 추궁을 당한 건 불과 결혼 한 달도 안 됐을 때였다. 날마다 바깥으로만 나돌다가,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멀다하게 구박과 폭력이 이어졌다. 심지어 바깥 살림을 차리기까지 했다. 불똥은 결국 동생한테까지 옮겨갔다.


"딴 살림 차리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밖에서 데리고 온 여자랑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어요."


결국 김정주 할머니는 숟가락 하나 챙길 겨를도 없이, 겨우 아들 하나를 포대기에 싼 채 도망치듯 집을 나와야 했다.

1심에 이어 2007년 5월 31일 나고야 고등재판소 판결에서 또 다시 기각 소식을 듣자,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들이 재판정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오열하고 있다.
▲ 기각! 기각! 기각! 1심에 이어 2007년 5월 31일 나고야 고등재판소 판결에서 또 다시 기각 소식을 듣자,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들이 재판정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오열하고 있다.
ⓒ 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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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매의 모진 삶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이른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언니 김성주 할머니는 막노동 공사판 일을 하며 어린 3남매를 키우며 고단한 삶을 살았고, 서른다섯에 이혼한 김정주 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과일 행상을 하며 모진 삶을 이어왔다.

뒤늦게 용기를 내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 했지만, 이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10년여의 재판 끝에 2008년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됐고, 동생 김정주 할머니가 후지코시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역시 지난달 24일 8년여 만의 소송 끝에 결국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미안해서 자식들에게도 일본 갔다 왔다는 말을 못했어요. 여태 큰길 한 번 똑바로 다녀 보지 못하고,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봐 '고삿길'로만...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해방 66년. 기구하다고 하기엔 너무 굴곡진 한 자매의 피맺힌 삶의 여정이다.

10월 24일 '국회 1일 희망릴레이' 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정주(왼쪽), 김성주(오른쪽) 할머니 자매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한 회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10월 24일 '국회 1일 희망릴레이' 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정주(왼쪽), 김성주(오른쪽) 할머니 자매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한 회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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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근로정신대, #한일협정, #징용, #김성주할머니, #김정주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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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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