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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를 보면서 빨리 알바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평소 매일같이 들어가는 알바 모집 사이트에서 '문서 이관'이라는 알바를 찾았다. 9시간(실제 근무는 8시간)에 일급 5만 원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시급으로 따져보면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지원서를 냈다.

알바 시작 전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알바를 알선해주는 업체(인력소와 비슷하다)로부터 온 전화였다. 업체 직원은 업무 시간과 수당에 대한 설명했고,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다.

"힘든 일인데 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나는 '할 수 있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장 천 원 한 장이 급한 터라, 근로계약서 없는 단기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하는 요령, 직원이 먼저 알려줬다면...

당장 돈이 필요해 시작했던 '문서 이관' 알바. 이렇게 많은 박스를 나르는 일인 줄 알았다면...
▲ 김길훈씨가 3일간 알바했던 OO은행 문서고 당장 돈이 필요해 시작했던 '문서 이관' 알바. 이렇게 많은 박스를 나르는 일인 줄 알았다면...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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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9시, 나는 OO은행 업무지원센터 뒷마당에 있었다. 곧 앞으로 내가 일할 업체의 직원('대리님'이라고 불렀다)이 왔다. 내 옆에는 나랑 나이가 비슷한 남자 3명이 있었다(세 명은 서로 친구였다). 대리님은 우리에게 이틀간 총 박스 2700개를 탑차에 옮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서 이관 아르바이트는 바로 문서가 담긴 박스를 나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박스가 있는 4층에 있는 문서고로 이동했다. 문서고는 엄청났다. 내 눈 앞에는 한 층을 가득 채운 선반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박스들이 놓여있었다. 내 머리보다 낮게 있는 파이프들이 있었다.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박스에 바코드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 바코드는 박스의 일련번호와 맞게 붙여야하는데 번호가 순서대로 있지 않아 다들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어떻게 하면 빨리 붙일지 고민하며 바코드를 붙였다.

30분 정도 지나자 바코드에 박스의 위치번호가 있어 그것에 맞게 붙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쁜 마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나서야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담당 직원이 먼저 알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결국 이 바코드 부착 작업이 늦어져서 끝내 일은 하루 더 연장되었다).

4명이 옮겨야 하는 박스가 2700여개, 무게 보다 힘든 건...

수레에 15개가 넘는 박스를 올리고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캐리어 위의 문서 상자들 수레에 15개가 넘는 박스를 올리고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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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후 본격적으로 박스 운반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제공된 장비는 5대의 캐리어(박스 운반하는 수레)와 목장갑이었다. 작은 캐리어에는 박스 13개, 큰 캐리어에는 15개를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리님은 작업 속도를 위해 15개, 17개 씩 쌓으라고 설명했다. 어느 정도 일을 익힌 뒤에는 스스로 20개 넘게 쌓아 옮겼다.

박스를 옮기는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게보다는 머리보다 낮게 있는 파이프였다. 캐리어를 옮길 때 통로가 좁아 뒤를 보면서 가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앞에 있는 파이프를 보지를 못하고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안전모가 구비되어 있었지만(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조차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작업하는 날 내내 최고기온이 34도를 넘을 정도로 무더웠다. 박스를 한 번 옮기고 나면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을 정도였다. 그나마 박스를 캐리어에 실으면서 에어컨 바람으로 땀을 식히지 않았다면 끝까지 작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첫날 600개, 둘째날 1200개 그리고 마지막날 900개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또 이 일이 들어오면 다시 일할지도 모르겠다.
▲ 박스 나르는 알바가 남긴 상처들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또 이 일이 들어오면 다시 일할지도 모르겠다.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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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는 총 박스 2700개 중 600개를 탑차에 옮겼다. 둘째날 오전 9시에 출근하자마자 대리님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시작했다. 대리님이 "오늘의 할당량은 1200개다"라고 말하자 내 머리는 바로 계산에 들어갔다.

'4명이니깐 한 사람당 300개, 캐리어 2대에 30개이니깐 10대만 옮기면 되니 몇 시간 일찍 끝나겠군.'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오산이었다. 실상은 이랬다. 문서고가 있는 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탑차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넘어가야 한다. 다시 문서고로 돌아온다. 이런 긴 동선으로 인해 결국 8시간 넘게 일을 하였다.

둘째 날에 1200개를 옮겼고 마지막 날에는 900개가 남았다. 마지막 날,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박스가 젖지 않게 비닐로 덮으면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아 입고 온 옷은 비와 땀으로 젖었다.

"이거 일에 비해 돈이 너무 적어요. 최저임금 조금 넘는데요."

작업 마지막 날. 박스를 옮기던 알바가 한 말이다. 나는 옆에서 맞장구를 치면서 속으로 '다시는 이 일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후 5시가 넘어 3일간의 일이 모두 끝났다. 다음 날 15만 원이 들어온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일이 끝난 후 얻은 것은 돈 뿐만이 아니라 박스 모서리에 긁혀 생긴 팔의 생채기들과 비와 땀의 젖은 내 모습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하니 뒤에서 대리님이 말을 걸었다.

"담에도 일 같이 하자고. 나중에 연락할게. 수고했어."

그 말을 듣기 바로 전만 해도 '다시는 이 일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의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는 없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알바노조 조합원입니다.



태그:#알바, #박스알바,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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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알바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2013년 7월 25일 설립신고를 내고 8월 6일 공식 출범했다.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인 시급 10,000원으로 인상, 근로기준법의 수준을 높이고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알바인권선언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http://www.alb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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