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SP음반 녹음을 부탁하는 지인이 얼마 전 또 연락을 해 왔다. 매우 특이한 음반 한 장을 구했는데, 딱지 상태가 희한해서 어떤 내용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녹음도 녹음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음반의 관련 정보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며칠 뒤 실물을 전해 받은 음반은 확실히 딱지 형태가 독특했다. 제목과 작자·가수 이름이 적혀 있을 자리가 하얀 종이로 단단히 덮여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일부러 풀칠해 붙인 것은 확실했다.
다행히도 고려레코드 상표와 음반번호 'K No. 3'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음반번호를 알면 제목이 지워지거나 가려졌어도 대개는 녹음된 내용을 직접 들어 보기 전에 파악할 수 있다. 가사지나 광고 같은 유관 자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려레코드 'K No. 3'은 1947년 8월에 발매된 것으로, 수록곡은 <해방기념가>와 <여명의 노래>다. 해방 이후 최초 음반회사인 고려레코드에서 세 번째로 제작한 음반이며, 며칠 앞서 나온 1번과 2번에는 신·구 <애국가>와 <조선의 노래>, <건국의 노래> 등이 수록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신문 광고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노래, 대체 뭘까
대강 파악이 끝났으니, 이제 녹음만 잘 마치면 작업이 끝난다. 음반 끄트머리가 약간 바스러졌고 두 군데 금이 있기도 했지만, 소리를 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소리는 생각보다 잘 나왔으나, 문제의 음반에 담긴 노래는 <해방기념가>도 <여명의 노래>도 아닌, 난생처음 들어 보는 생경한 곡조였던 것이다.
<해방기념가>는 악보와 가사 자료가 확인되고, <여명의 노래>는 지난 1991년에 CD로 복각까지 된 바 있다. 재삼 비교해서 확인했지만, 앞뒷면 모두 두 곡과는 분명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음반번호 'K No.3'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통상 앞면은 A, 뒷면은 B로 표기되는데, 하얀 종이를 덧댄 이 음반은 양쪽 모두 B, 그러니까 'K No.3 B'로 되어 있었다.
쉽게 풀릴 듯했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선 해 볼 수 있는 일은 덧붙여진 종이를 벗겨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딱지에 손상이 가면 안 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조금씩 종이를 제거해 갔다.
음반 녹음 내용을 알려 주는 표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했건만, 제거 작업이 진행될수록 또다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대와 달리 딱지에 적힌 내용은 양쪽 모두 원래 'K No.3 B' 그대로 <여명의 노래>였던 것이다. 녹음된 소리와 딱지 표기가 서로 아무 관련이 없었던 셈이다. 하얀 종이가 덧붙여진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당초 음반을 받아들고 번호만 먼저 확인했을 땐 내심 이렇게 추정을 했다. <여명의 노래>를 작곡한 이건우가 1950년에 월북, 이후 북한에서 많은 활약을 했기에, 그 이름을 지우기 위해 종이를 붙여 가렸을 것이라고(<해방기념가>는 남쪽에서 활동한 이흥렬이 작곡). 나름 그럴듯한 추정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소리도 들어 봤고 딱지 표기도 확인했으나, 음반의 정체는 더욱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녹음 내용을 듣고 단서를 잡아 보려고도 했지만, 정말 처음 들어 보는 멜로디인 데다가, 열악한 음질이다 보니 아무리 들어도 가사는 단 한 마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추적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상당히 막막한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접는 것도 안 될 일이라, 고려레코드 관련 자료를 하나씩 다시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눈에 띄는 광고를 곧 찾아낼 수 있었다.
인용한 잡지에서 원본 출처를 밝히지 않아 정확한 게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48년 봄 무렵으로 추정되는 신문(또는 잡지) 광고다. <가거라 삼팔선>, <흘러온 남매> 등 대중가요 히트곡과 함께 광고에서 고려레코드 '기발매'로 소개한 제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민족청년단가>, <대한독청단가>, <대동청년단가> 같은 곡들 중에서 음반에 담긴 노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왠지 모를 느낌이었다.
실마리를 제대로 잡아서 그랬는지, 검색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우선 1946년 12월 일간지 기사에서 조선민족청년단 단가의 한 구절을 확인했다. 그냥 녹음만 들어서는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가사가 기사와 대조해 들으니 바로 파악이 되었다. 문제의 음반에 수록된 두 곡 중 하나는 1948년 봄 추정 광고에서 <민족청년단가>로 소개한 조선민족청년단 단가였던 것이다.
'족청'의 노래 두 곡을 담은 음반
다른 면에 실린 노래도 이어지는 검색으로 역시 정체가 드러났다. 2016년 수원박물관에서 펴낸 <수원 근·현대 증언 자료집 Ⅷ: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들의 증언이 수록되었는데, 그 한 대목에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가 가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가와 마찬가지로 녹음과 대조해서 들으니 같은 노래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줄기 단군의 피다/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요 나라/ 내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내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조선민족청년단 단가>
수원성 옛 터전에 새 구령 소리/ 아는 듯이 산도 낮아 앞길을 트인다/ 늦을라 어서 바삐 깃발을 따라/ 늦을라 어서 바삐 깃발을 따라
<조선민족청년단 훈련소가>
두 곡 이어서 듣기
'족청'이라는 약칭으로도 유명했던 조선민족청년단. 1946년 10월에 결성되어 한때 대단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우익 청년단체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이 바로 이 족청을 조직해 정치 기반으로 활용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1949년 1월 대한청년단에 통합되어 해산한 이후로도 '족청계'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나중에 축출되기는 했으나,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이 족청계였다.
족청의 노래 두 곡을 담은 음반은 1947년 8월 이후, 1948년 봄 이전에 제작된 것은 분명하나, 그밖에는 아직 제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 더 많다. 기사와 구술을 통해 확인한 1절 외 다른 가사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고, 누가 만들고 누가 녹음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 수첩이 그에 대한 궁금함을 상당히 풀어 줄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긴 한데, 아쉽게도 보관처 이전 문제로 당분간은 열람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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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족청년단 단원 수첩.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민족청년단 이름이 대한민족청년단으로 바뀌었다. |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관련사진보기 |
언젠가 자료가 더 나오면 70여 년 전 족청의 노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겠지만,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 공교로움도 있다. 대표적인 우익 청년단체 노래가 녹음된 음반에 왜 하필이면 월북한 좌익 작곡가 작품을 표기한 딱지가 붙었던 것일까. 그 위에 덧댄 백지에는 또 왜 아무런 표기가 없었던 것일까. 보람도 있었지만 의문도 남는, 기이한 좌우합작(?) 음반 발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