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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하루는 한참 유튜브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가 오더니 불쑥 말을 건넨다. "아빠, 누가 연주하는 거야? 너무너무 잘 치네. 소리가 귀에 쏙쏙 박혀." 역시! 동네 학원 다니는 초등학생한테도 여타 피아니스트의 연주와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하긴 나도 처음 접했을 때 눈이 휘둥그레졌으니까.

그리고리 소콜로프.

이 피아니스트와의
진지한 첫 만남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였다. 이 곡의 전설적인 명연주로 평가되는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 음반을 소싯적에 귀가 닳도록 듣다 보니, 사실 다른 사람의 연주에 큰 기대는 없었다. 소콜로프의 영상은 화질과 음질이 좋지 않았는데, 유카-페카 사라스테가 지휘하는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이 오케스트라 파트를 맡은 1987년 헬싱키 공연 실황이었다.

호른이 주제선율을 연주하며 1악장이 시작되면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피아노도 합류한다. 이 부분이 해돋이 무렵의 지평선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운치가 있는데,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탄탄한 양손이 저음부에서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며 으뜸화음의 구성음들을 쌓아 올린다. 이 도입부에서부터 나는 소콜로프의 포로가 되었다.

피아노 연주 두 마디에 입이 쩍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리고리 소콜로프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 도이치 그라모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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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것 있지 않나. 책의 첫 문장부터 작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는 경우 말이다. 고작 피아노 연주 두 마디에 입이 쩍 벌어지더니, 20분 가까이 소요되는 1악장 연주 내내 무언가에 홀린 듯 음악에 빠져들었다. 소콜로프의 연주가 만들어내는 몰입감은 난다 긴다 하는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들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이 긴 협주곡의 음 하나하나를 산문이 아닌 운문 수준의 밀도로 표현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과연 또 있을까.

나름 음악 애호가로 어설프게나마 피아노도 뚱땅거리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같은 거장들의 연주도 제법 들어봤지만, 그 어떤 연주에서도 소콜로프만큼 충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당시 느낌은 '왜 내가 이제껏 이 사람을 몰랐을까?'였다.

그리고리 소콜로프는 1950년 4월 18일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5세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7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 영재학교에 입학해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영재학교 졸업 후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공부를 이어나갔다. 1966년에는 역대 최연소인 16세의 나이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는 무명의 16살 소년을 우승자로 선정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거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에밀 길렐스도 억울할 만한 것이,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을 보면 심사위원 투표용지를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어김없이 소콜로프의 이름이 호명된다. 압도적 차이로 우승한 것이다. 16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참가자들과는 격이 다른 기량을 보여줬으니 가능한 일일 테다.

당시 대중들의 막무가내식 비난 여론에 소콜로프도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았다. 인터뷰를 꺼리는 성격 탓에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내가 살펴본 몇몇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얘기했다. 비평가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젊은 음악가의 연주는 신선하고 즉흥적이라고 평하고, 나이 먹은 음악가에 대해서는 연륜과 성숙함만 얘기한다며 못마땅해했다.

요절한 천재 예술가들도 원숙한 성과물을 남기지 않느냐며, 진정한 음악가는 젊은 나이에도 성숙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소콜로프가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한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은 나로서는,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걸 16살 피아니스트의 연주라고 하겠는가.
 
2등 수상자인 미국인 미샤 디히터(왼쪽), 심사위원장 에밀 길렐스(중앙), 그리고 우승자 그리고리 소콜로프(오른쪽).
▲ 제3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주역들 2등 수상자인 미국인 미샤 디히터(왼쪽), 심사위원장 에밀 길렐스(중앙), 그리고 우승자 그리고리 소콜로프(오른쪽).
ⓒ 차이콥스키 콩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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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음반 제작에도 거부감을 갖고 있다 보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과 왕성한 연주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머니 속 날카로운 송곳이 어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드문드문 남긴 음반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관객들이 몰래 녹음한 수많은 음원이 유튜브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클래식 애호가들의 입에서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더니, 언제부터인가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음악계 인사들의 평가를 들어보면 그가 지닌 압도적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 부사장을 역임하고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을 만들어 세계적인 음악제로 키워낸 마틴 엥스트롬은 'Grigory Sokolov - A Conversation That Never Was'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소콜로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전 높은 수준의 피아노 연주에 익숙하지만, 소콜로프는 그것도 뛰어넘죠. 때론 정말 놀라워서 이런 피아노 연주가 가능한지도 몰랐을 정도입니다. 그의 연주를 라이브로 들어본 적이 없다면 꼭 들어봐야 해요."

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콘서트 매니지먼트를 오랫동안 담당해온 마르코 리아스코프도 소콜로프에 대한 동료 피아니스트들의 반응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해준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죠.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동료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죠. 전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거의 다 아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샤(소콜로프의 애칭)를 존경해요. 전부 다요. 라두 루푸나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물어보면 다들 '소콜로프 대단하지. 놀라운 명연주자, 놀라운 음악가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엄청난 마력이 누군가에는 불편함으로

물론 소콜로프의 연주에 대해서 찬양 일색인 것은 아니다.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1988년생으로 18세의 나이에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해 지금껏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10대 시절부터 소콜로프의 희귀음반을 모을 정도로 대단한 팬이었다. 하지만 2017년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언제부터인가 소콜로프의 연주를 멀리하게 됐다며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그리고리 소콜로프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는데요, 사람들은 그 사람이 50대 후반까진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근데 갑자기 60대부터 엄청 신적인 존재가 됐어요. 저는 10년 전에 소콜로프 음악 되게 좋아했어요. 되게 중독적이고 어떤 음악을 치든 이 사람 연주가 들리지, 이 사람이 뭘 연주하는지는 안 들려요. 이 사람이 어떻게 치는지만 들려요. 처음엔 그게 너무 중독이 되니까 소콜로프가 최고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곧 너무 공허해졌어요. 음악을 다 듣고 나면 여운이 남아야 되는데 그냥 이 사람이 만들어낸 긴장감이랄까요? 이 사람이 청자를 딱 옭아매는 긴장감이 연주 기법이나 표현 방식에서 드러나는데 어느 순간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못 견디겠는 거예요. 너무 세밀하게 잘 가꾼 공원 같아. 자연 그대로 유지된 게 아니라 너무 잘 만들어진 공원인 거죠. 난 저렇게 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어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이러한 평가는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다. 소콜로프의 연주를 문학평론에 비유하자면 평론 글 자체가 워낙 뛰어나고 개성적이라 오히려 대상이 되는 문학작품이 가려지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실제 소콜로프의 연주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작곡가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소콜로프가 만들어내는 초월적 음향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작곡가들이 부활해 연주를 듣는다면 내 곡이 이렇게 훌륭한 곡이었느냐며 깜짝 놀랄 것 같다. 사람을 휘어잡는 이 엄청난 마력이 누군가에게는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에서) 본말이 전도된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소콜로프가 연주하는 브람스 인터메조 Op.118-2를 들으면서 김선욱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브람스 인터메조 Op.118-2는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당대에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을 연모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 절절한 감정을 담은 피아노 소품이다. 내가 개인레슨까지 받으며 연습했던 곡이라 악보를 세세하게 알고 있기도 한데, 여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비교 감상하다가 소콜로프의 연주를 듣고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신에게 드리는 처절한 신앙고백이라고 느낄 정도의 긴장감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대단한 연주이지만, 한편으로는 곡의 전반적 정서를 고려했을 때 너무 과한 해석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소콜로프가 연주하면 바이엘에도 극도의 긴장감과 고뇌를 담을 수 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본 적이 있는데, 제법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소콜로프에 대한 찬반양론이 동일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음향이 여타 피아니스트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청자를 매료시킨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소리가 어떻길래? 음향의 다이내믹이 상당히 극적이며 음색 또한 천변만화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음 하나하나가 진주알처럼 명료하다. 그 명료함을 구현하기 위해 논레가토 주법으로 음 하나하나를 끊어서 치는데, 각각의 음이 자기만의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앞뒤 음의 공간과 절묘하게 중첩되어 연결된다.

그래서 소콜로프의 논레가토는 단순히 음이 툭툭 끊어지지 않는다. 레가토 주법 이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음 하나하나가 단단한 보석처럼 명징한, 이율배반적 울림을 형성한다. 이런 독보적인 음향을 구현하려고 도대체 어느 정도로 건반 터치와 페달링을 연구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소콜로프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경우 연주회장의 피아노를 분해해 재조립하기도 한단다. 그가 음반 제작을 기피하는 이유도, 자신이 공연장에서 만들어내는 음향의 디테일을 음반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연 보러 유럽에 가야겠다

소콜로프는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향이 다분해 어린 시절 나비를 수집하고 분류해 앨범을 만들고, 모형 비행기로 방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교통수단에 흥미를 느껴 방문한 도시의 버스 노선과 정류장을 샅샅이 파악해 외울 정도였다.

이러한 기질이 피아노 연주에까지 이어져 놀라운 완성도의 음향을 만들어내며, 청중은 그 소리의 심연에 빠져들어 마치 예배를 드리듯 연주를 경청하게 된다. 유럽에서 소콜로프의 공연을 직접 들은 한국인들이 남긴 후기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연주를 직접 들은 사람으로서 연주회장에서 눈물 흘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최고예요. 음반으로는 절대 경험 못 합니다. 스튜디오 녹음 안 하는 이유가 있어요."

"충만함에 가득 차서, 여운을 음미하며 기분 좋게 귀가할 수 있게 하는 연주가 아니었다. 듣는 이를 숨 막히게 하고, 황홀하게 하고,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결국은 기진맥진하게 하는 연주였다. (중략) 어떤 이들이 소콜로프의 연주를 종교적 체험에 빗대는 게 이해가 된다. 신앙의 그것처럼 사람을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소콜로프의 실연을 듣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던 십대 시절 친구들이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책받침에 목숨 걸 때도 올곧은 선비처럼 초연했는데, 이 나이 먹고 70대 노인의 팬이 되어 공연장 찾아갈 궁리를 하게 되다니. 공연장에서 소콜로프 사인 있는 책받침을 판다면 웃돈 얹어서라도 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연세가 많은 양반이라 하루라도 빨리 들어야 하는데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서 유럽에서만 연주한다니 마음이 조급하다.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소콜로프 공식 홈페이지(https://www.grigory-sokolov.net)에 나와 있는 연주 일정에 맞춰 카드 할부를 돌려서라도 유럽에 가야겠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후회할 일은 하나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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