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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다크룸
- 이훤

불이 다 꺼져도 손은 보지

컵과 식탁과 의자 사이를 언어가 짓는 동안
이불과 베게
베개와 침대 사이를 짓는 동안

빛은 보지

장면이 있기 전 빛이 먼저 보는 장면

검은 벽과

검은 손을 잇는다 결국 사라지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필름을 들어
작은 어둠을 개봉하면
튕기듯
태어나는 릴과 젤리틴 카펫

둥글게 자신을 꽉 안고 있는 기억
거치대에 몸을 넣으면 어떻게든 생겨나는 다음

불이 꺼지면
다음이 다음을 만든다

수세하고 현상액을 넣고 물을 붓고
안전해지고
어제와 지금이 이어지고

다 마르고 나면
옷과 살 사이에 식탁과 컵과 베개의 언어가

잘라내지 않는 자리에는 모든 사진이 있다

릴이 버려지고
문이 사라지고

벽은 이전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가능해진 사람들이 스위치를 켜며 손이 다른 손을 목격한다

- 『양눈잡이』 , 아침달, 2022년, 29~31쪽


고등학교 시절 저는 부지런한 학생이었습니다. 다만 그 시절 가장 중요했던 '공부'만큼은 부지런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요. 청소년 RCY에 가입해서 캠핑도 열심히 다녔고 학교 합창반에서도 활동했습니다.

한 선배의 추천으로 학교 밖 동아리에도 가입했었는데요. 대전 YWCA에 속해 있었던 '심지'라는 사진 동아리였습니다. 고등학교 연합동아리였기 때문에 여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사진이라는 재미에 한동안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훤 시인의 시집
 이훤 시인의 시집
ⓒ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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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으러 야외로 나가는 것을 '출사 간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동아리 한편에 있었던 암실에서 사진을 직접 인화해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인화하는 과정은 실로 신비로웠습니다.

우리말로 '암실'이라고 불리는 공간, 영어로는 '다크룸(darkroom)'이라고 말합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작은 방입니다. 사진 인화 시 암실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까닭은 인화지와 필름이 빛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빛을 완전히 차단한 상황에서 작업해야만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빛이 없어야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방,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은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사진을 영어로 'photography'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의 어원을 살피면 '빛'과 '그린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phos'와 'graphos'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어쩌면 사진이 빛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암실이라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짙은 새벽의 모체 속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저 빛은 풍경과 함께 사진으로 찍히고 인화되어 내 기억(추억)으로 남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빛이 먼저 본 풍경'입니다. 화자는 말합니다. '빛은 보지 / 장면이 있기 전 빛이 먼저 보는 장면'. 우리가 보는 풍경은 빛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형상입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암흑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시적이라고 느껴졌던 문장 중 하나입니다.

시적이라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꼼꼼히 뜯어보면, 과학적인 현상, 사건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얘기하는 상황, 우리가 눈으로 보기 전 '빛이 먼저 보는 장면'이라는 문장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이기까지 합니다. 과학적인 현상에 대한 사실 표현이 시와 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암실에 대한 얘기도 시적입니다. 이 시에선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을 비유적를 섞어 얘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말합니다. '수세하고 현상액을 넣고 물을 붓고 / 안전해지고 / 어제와 지금이 이어지고'라고. 그런데 왜 이것을 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시를 말할 때 '낯설게 보기'를 강조합니다. '낯설다'라는 형용사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든 현상을 얘기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느끼지 못했던 모든 것을 '낯설다'라고 얘기하는데요,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은 대다수에게 생소하고 낯선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낯섦이 자연스러운 비유와 함께 시속으로 녹아들었고 시적인 문장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성질도 한 몫을 합니다. 하나의 단어와 의미가 1대 1로 연결된다면, 시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시가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같은 단어나 문장이 때와 상황, 뉘앙스에 따라서도 달리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과학적인 문장도 달리 읽힐 수 있기에 적재적소에 사용한다면, 어떤 시적인 문장보다도 시적일 수 있습니다.

이훤 시인은...

2014년 <문학과의식>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사진학 석사를 마쳤으며, 시집으로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등과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덧붙이는 글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태그:#이훤시인, #양눈잡이, #아침달, #다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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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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