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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초대 주석인 호찌민은 화장되어 소박하게 묻히길 원했지만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거대한 묘역안에 모셔져 있다.
▲ 호찌민 묘소 입구 베트남의 초대 주석인 호찌민은 화장되어 소박하게 묻히길 원했지만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거대한 묘역안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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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중국과 달리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각종 SNS 사용이 자유로운 국가다. 게다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다르게 국가 주석이 전면에 나서는 일도 드문 편이다. 하지만 거리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빨간 볼드체로 강조된 현수막과 구호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심상치 않게 보이고, 공권력이 엄정한 탓인지 단속이 지나갈 때마다 노점상들은 재빨리 그들의 도구를 치운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그 분위기가 가장 실감 나게 느껴지는 구역은 바로 호찌민 묘역(바딘광장) 주변이다. 바딘광장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주석궁, 정부부처 등이 모여 있어 한 마디로 베트남 정치의 1번지라 불릴 만하다.     
     
 하노이의 거리곳곳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이 두루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깃발탑 앞에 있는 레닌광장과 레닌의 동상이다.
▲ 레닌광장의 레닌동상  하노이의 거리곳곳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이 두루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깃발탑 앞에 있는 레닌광장과 레닌의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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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노이의 상징 중 하나인 못꼿사원, 호찌민 관저와 박물관이 한 구역 내에 두루 모여있다. 주석부구역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여 입구에서 검문검색만 받으면 누구나 쉽게 관람이 가능하다.

코로나 전과 달리 외국인들보다 베트남 국내 여행객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나는 듯하다. 팬데믹 이후 해외 여행객들의 발길이 줄면서 방치되어 있는 리조트, 호텔을 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베트남 정부는 자국민들에 대한 여행 장려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중 하나가 베트남의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포토스폿을 적극적으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효과는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베트남의 소득이 오를 때마다 자국민의 여행객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그에 따라 관광지의 물가도 예전보다 많이 오를지도 모른다. 바딘광장은 본래 하노이의 근교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로 조성하였으나 후에 도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문으로 편입되었고 당시 북쪽 지역의 문화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성벽과 문을 제거하고 광장을 만들었는데 이때 독립운동을 펼쳤던 바딘의 이름을 따서 바딘광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바딘광장 주위에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정부관련기관 들이 밀집해 있다.
▲ 국회의사당 바딘광장 주위에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정부관련기관 들이 밀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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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딘광장에서는 많은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5년 호찌민이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1969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영결식 또한 개최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가 죽은 뒤 방부 처리된 시신은 지금도 광장을 바라보는 거대한 석조건물에 모셔져 있다. 

늘 검소하게 생활했던 호찌민은 화장해서 베트남 각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채 신격화 되어 수많은 방문객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은 베트민을 조직해 프랑스의 지배를 물리치고 독립을 이뤄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베트남 통일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본명은 응우옌신꿍이지만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의 가명인 호찌민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실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기에 그는 가명이 대략 196개에 달했다. 아버지인 응우옌 신삭은 가난한 유학자였지만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관리를 거부하고 불북종을 이후로 해직된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교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참여했다. 프랑스, 세네갈, 미국을 떠돌며 서구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식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며 신물과 사상을 배운 호찌민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는 물론 각종 언어에도 능통했다.
 
바딘광장에서는 정시마다 근위병 교대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제식은 엄숙함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 바딘광장의 근위병 교대식 바딘광장에서는 정시마다 근위병 교대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제식은 엄숙함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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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우옌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 민주, 평등권을 요구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패전 국가를 분할하기 위한 의도였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줄 명분이나 이유가 아니었다. 호찌민은 이때 해방은 식민통치세력의 선심이 아니라 무장 투장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1920년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하기도 한다.     

1930년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고 베트남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호찌민은 영국 경찰, 중화민국의 군대에 잡혀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지만 해방 직전 미국 OSS에 들어가 베트남의 반일 작전을 펼쳐나간다.

결국 민중봉기에 성공함으로써 호찌민은 베트남 주석으로 선출되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철수할 마음이 없었고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패퇴할 때까지 참혹한 전쟁이 수년 동안 이어진다.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남, 북으로 분단되면서 우리가 아는 베트남 전쟁까지가 우리가 아는 호찌민의 일대기다.
    
호찌민은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 자리에 올랐지만 줄곧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바딘광장의 끝에는 노란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화려한 주석궁이 지금도 자리한다. 이곳은 본래 프랑스의 총독부다. 상당히 호화스러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이곳을 거부하고 주석궁 옆 연못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기서 생활했다. 나무 원목으로 지어진 관저는 내부가 다 들어다 보이는 소박한 구조다.

그의 일대기는 산책로를 걸어가면 나오는 호찌민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전에 오른편의 연못에 한 기둥을 받치고 올라가 있는 조그마한 불당이 보이는데 이곳이 하노이의 국보 1호라 칭해지는 못꼿, 한 기둥 사원이라 하는 장소다. 1049년 리 태종이 연꽃 위에서 관음보살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연꽃 모양을 본떠지었다고 전해진다.      
 
하노이 주석궁구역에 위치한 못꼿사원 즉, 한기둥사원은 하노이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 못꼿사원 하노이 주석궁구역에 위치한 못꼿사원 즉, 한기둥사원은 하노이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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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처럼 1개의 기둥으로 지어졌는데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전설이 존재해 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늘 하노이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못꼿사원은 프랑스 지배, 베트남 전쟁 당시 두 차례나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곳의 아늑한 분위기는 이 공간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경기별곡 2편)가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연, 기고 협업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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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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