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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한미일연합훈련을 가리켜 '극단적 친일국방'이라고 주장한 이래 정치권에서는 해당 현안을 두고 연일 뜨거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는 '친일'이나 '종북' 같은 단어를 뿌리로 하는 원색적인 공격만이 읽힐 뿐, 정작 문제의 핵심인 '자위대'의 존재에 관한 진지한 고찰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자위대는 도대체 어떤 조직이고, 또 한국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곱씹어보지 않는 한, 한미일 연합훈련을 문제삼는 담론은 공허할 뿐이다(관련 기사: [주장] 한미일연합훈련이 친일의 문제? 번지수가 틀렸다).

자위대가 어떤 존재인지 검토해보기 위해서는 역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일본이 무모하게 도발했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처절한 패전으로 귀결되었고, 전쟁의 몸통이었던 일본 육해군은 1945년 11월 30일을 기해 해산되었다.

일본을 접수하고 반미적인 전쟁지도자들을 제거한 미국의 뜻에 따라, 기존의 '대일본제국 헌법'이 폐기되고 이른바 '평화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은 신헌법을 통해 비무장을 선언하고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무력행사를 포기할 것을 못박았다.

일본 재무장론의 부상
  
1945년 9월 이후 순차적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11월 30일을 기해 일본 육해군은 완전히 해산되었다.
▲ 항복조인식에서 스스로의 무장을 해제하는 아다치 하타조 중장 1945년 9월 이후 순차적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11월 30일을 기해 일본 육해군은 완전히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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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천황의 통수권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내각의 문민통제를 거부하고 침략전쟁을 도발하던 주체였으므로, 일본 육해군을 해산시키는 것은 극동 안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미국에게 일본은 전쟁 이전부터 부담스러운 가상적국이었으므로, 일본의 무장해제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일본의 비무장화는 미국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지만, 정작 일본의 비무장화를 이뤄낸 미국의 의지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전후의 질서 위에서, 한때 추축국 타도를 기치로 의기투합했던 소련의 존재는 미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비무장 상태의 일본이 손쉽게 '적화'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미 육군과 국무부를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일본 육해군의 해산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1946년의 시점에서 일본 재군비에 대한 검토 논의가 미국 내에서 등장한 것은 얄궂은 일이었다.

전후 병력부족에 시달리던 미군의 입장에서, 일본의 재무장은 분명 극동 방어에 큰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일본을 방어하느라 전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극동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일본 재무장안은 미국에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의 재무장이 역으로 소련을 자극하여 일본 침공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군비지출이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에 부담이 되어 오히려 공산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일본이 재무장 후 다시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부상할 가능성, 중국, 호주, 필리핀 등 주변 우방들의 불만을 살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미국은 연합군최고사령부를 통해 사실상 일본을 통치했다.
▲ 맥아더 사령관과 쇼와 천황 미국은 연합군최고사령부를 통해 사실상 일본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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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합군최고사령부를 통해 사실상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했던 맥아더 사령관은 본국에서 높아지는 일본 재무장론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현지 사령관의 판단을 중시한다는 관습이 있었기에, 맥아더 사령관의 반대론은 일본 재무장론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다만, 맥아더 사령관은 '전쟁 등 유사 시에 일본의 인적자원을 활용해야 할 계획의 필요성'에는 찬성하며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49년 3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 시점에서 (일본의) 재군비 실시는 바람직하지 않으나, 유사시 일본방위를 위해 그 군사적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게 선행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吉田真吾, 「日本再軍備の起源: 米国政府内における検討の開始と頓挫, 1946年~1949年」『近畿大学法学 第66巻第3・4号』2019, 268p)


여기서 요구된 선행조치란, 장래에 한정적인 일본군을 창설할 계획 입안하는 것, 경찰과 해상보안청을 강화하고 무장화시켜 '한정적 일본군'의 핵으로 삼는 것, 한정적 일본군을 동원할 시 병기, 장비, 탄약 등의 공급에 관한 병참계획 입안하는 것 등이었다.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비군사화를 핵심으로 하는 점령 정책과 모순되는 점, 여기서 비롯되는 국제사회로부터의 압력 등을 이유로 일본 재무장안 추진을 주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벌어진 조선인민군의 대대적인 남침은, 일본 재무장을 가로막던 최후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령'했다. 경찰예비대는 훗날 자위대로 이어진다.
▲ 육상자위대의 전신이 된 "경찰예비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령"했다. 경찰예비대는 훗날 자위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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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8일,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 정부에 '경찰예비대 창설'과 '해상보안청 확충' 지령을 내렸다. 이것으로 일본의 재군비는 사실상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군을 보조하는 전력으로서 한국전쟁 내내 '활용'되었다. 일본의 무장, 일본 병력의 한반도 개입 등은 전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재무장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1954년, 미국의 승인 아래 경찰예비대와 해상보안청 전력을 기반으로 자위대가 정식 창설되었지만, 사회당을 비롯한 이른바 '혁진진영'에서는 자위대의 존재가 평화헌법을 거스르는 위헌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자위대를 부정하는 목소리는 비단 정치권이나 운동권 일각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사회는 지난날 나라 위에 군림하며 전횡을 일삼았던 옛 일본군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다(관련 기사: [주장] 대선토론에 등장한 '일본군', 진실로 안보에 도움되나).

'자위대는 세금낭비', '방위대생과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시위구호가 등장하는 등 자위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특히, 1960년 발효된 일미 신안보조약은 일본 민중의 분노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310만의 국민이 희생된 전쟁이 끝난 지 15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추진된 '군사동맹'은 일본 민중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회를 집어삼킬 듯한 대규모 시위는, 결국 일미 신안보조약을 추진한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총사퇴로 이어졌다(관련 기사: '평화 헌법'의 일본은 어떻게 군사대국이 되었나).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이른바 '방위문제'는 일본 사회에서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붕괴가 재현될 것을 우려한 이후의 정권들은 자위대나 안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특히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뒤를 이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는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군사가 아닌 경제와 민생에 집중하겠다고 천명하며 방위문제가 화두에 오르는 것을 극력 회피했다.

'자위대'라는 그림자 같은 존재 
  
일미 군사동맹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으로 전임 기시 내각이 붕괴하자, 그 뒤를 이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방위문제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민생과 경제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 제1차 이케다 내각 일미 군사동맹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으로 전임 기시 내각이 붕괴하자, 그 뒤를 이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방위문제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민생과 경제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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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가운데 고도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일미군사동맹을 계기로 끓어올랐던 대중의 분노 어린 관심도 식어갔다. 자위대는 실존하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자위대가 다시 세상 밖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이후 각종 자연재해 상황에 자위대가 투입되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들과 자위대 지원 운동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즉, 사회가 마비되고 시민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위대라는 긍정적 인식이 대중들 사이에서 확산된 것이다.

분노에 이은 무관심을 넘어 비로소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위대의 정체성과 법적 지위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 모호성을 지워내겠다는 취지로 아베 신조 전 총리 등이 개헌을 추진해왔지만, 자위대의 개편이 일본군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망하기 어렵다.

가령 2015년 9월, 민주당 대표이던 시절의 하토야마 전 총리는 지방 유세에서 '유사시 병력이 부족하게 될 경우'를 상정하며 '긴급사태 법제 안에서 징병제를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헌법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거센 역풍을 맞았다. 징병제 사회인 러시아마저 유사시 병력동원에서 커다란 잡음을 내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오랜 세월 평화헌법 체제에서 살아왔던 일본 시민 사회가 일본군의 부활이나 동원 체제를 쉬이 납득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본육군 항공대 장교 출신의 역사학자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교수는 저서인 <천황의 군대>에서 자위대가 미군에게 종속돼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국회로부터의 통수권'보다 미군이 요구하는 '작전준비'가 더 우선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 미군과 자위대의 연합훈련 본육군 항공대 장교 출신의 역사학자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교수는 저서인 <천황의 군대>에서 자위대가 미군에게 종속돼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국회로부터의 통수권"보다 미군이 요구하는 "작전준비"가 더 우선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 육상자위대 제13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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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기억해야할 점은, 일본의 방위문제를 논할 때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위대의 창설과 운용, 일미군사동맹 모두가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지령 내지 미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방위문제는 일본사회가 자주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 내 정국을 뒤집을 수도 있는 까다로운 뇌관인 셈이다. 이 상황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없이, 일본에 대한 편견을 기반으로 한미일 연합훈련을 극단적 친일로 비난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전시작전권을 갖지 못하고 미군의 지원이나 연합 없이는 독자적인 작전을 꾸릴 수도 없는 한국은, 일본을 정치군사적으로 예속 상태에 놓고 있는 미국의 의지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中原雅人「三八豪雪と自衛隊――一九六〇年代の自衛隊の印象に関する一考察」『戦争社会学研究6 ミリタリー・カルチャー研究の可能性』2022

吉田真吾 「日本再軍備の起源: 米国政府内における検討の開始と頓挫, 1946年~1949年」『近畿大学法学 第66巻第3・4号』2019

吉田真吾「日本再軍備の停滞: 米国政府による不決断の過程と要因, 1949年9月~1950年8月」『近畿大学法学 第67巻第3・4号』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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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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