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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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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기념문집에서 몇 분의 글을 발췌한다.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의 <바위의 이끼는 늙지 않았다>의 한 대목이다.

한 변호사 화갑기념문집에 쓴 글 말미에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도 이끼는 바위처럼 천년을 누리고 만년을 살거라고 했는데, 내 생각대로 한 변호사는 단단한 바위처럼 꿋꿋이 미수(米壽)를 맞았다. 그의 삶을 다시 돌아보니, 그는 검사요 변호사요 인권운동가요 문필가요 교수요 지식인이요 고위공무원으로 다양한 삶의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칠전팔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부정이나 불의 앞에서 확고하고 엄격한 자세로 대결하는, 흡사 단애(斷崖)에 버티고 선 천년의 바위 같은 모습을 지켜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유시춘(작가, EBS 이사장)의 <민주화운동의 대열에서>의 한 대목이다. 

2001년 국민의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창설하고 나는 상임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3년 기간동안 변호사님과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때마다 변호사님이 나지막하게 조근조근 정감 가득한 유머를 들려주시곤 했다. 

촌철살인, 순발력이 녹아 있는 것은 암울한 현실을 가로지르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지적 통찰력이다. 실로 부드러운 종횡무진이 아닐 수 없다. 

청춘은 결코 생물학적인 나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영락과 부패 뿐이다." 이상을 향한 열정의 상태를 지니는 한 청춘은 영원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승헌은 영원한 청춘이다.

김은정(전북일보 선임기자)의 <내 인생의 숲을 빛내주신 스승>의 한 대목이다. 

농민군 유골 봉환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보여 준 변호사님의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도 잊을 수 없다. 훗가이도대학에서 열린 농민군 유골 봉환식에서 변호사님은 직접 쓰신 고유문에 일본 정부의 사과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낭독하셨는데, 훗가이도대학의 하이야 게이조 교수는 그에 화답하듯 일본 대학이 진행한 식민학과 인종론 연구와 유골을 수집 방치한 과거의 일들을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사과했다.

특히 하이야 교수는 문학부 이노우에 교수와 함께 유골 봉환에 동행, 전주에서 열린 진혼식에도 참석해 사과문을 직접 낭독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봉환단과 함께 전주까지 동행한 데는 변호사님의 권유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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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달(전 국회의원, 우석대학교 명예총장)의 <내 인생의 등대, 한승헌변호사님>의한 대목이다.

박근혜 정권말기, 촛불정국이 한창일 때 '민청학련동지회' 총회가 열렸다.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고 박형규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을지로5가 서울제일교회 강당이었다. 당시 상임대표는 유명한 사형수 이철 동지였다. 한승헌 변호사님도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는 무료 변론 등 여러 면에서 깊이 관련이 있어 고문으로 계셨다. 

이날 총회는 시국문제와는 관계없이 실무적인 안건만을 처리하고 끝나 내가 집까지 모시기로 하였다. 그런데 귀가 중에 나는 꾸지람 아닌 '엄중 경고'를 받았다.

"역전의 민주투사들이 모처럼 모였으면 하다못해 성명서라도 하나 내야지 이게 뭔가!" 하시면서 여간 실망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토록 철저한 시국인식과 역사의식을 미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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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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