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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축구를 배우고 싶지만 방법을 몰랐던 시절, 집 근처에서 팀을 찾아보기로 했다. 지금이야 SNS에서 '여자축구' 등의 몇 가지 키워드로 검색하거나 네이버 카페 '모두의 풋살' 같은 곳을 뒤지거나 주변 축구 친구들에게 수소문하는 등 축구에 필요한 정보를 찾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팀을 구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포털 사이트에 'OO구 축구팀'이라고 검색해보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카페 한 곳에 올라온 신입회원 모집 글을 발견했다. 집에서 차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풋볼팀 신입회원 모집합니다. 여성도 무관. 신입도 무관. 지난주에 신입회원 6명 오셨는데 6명 모두 가입했어요. 매주 수요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이거다, 유레카! 여성도, 초보도 환영한다는 말보다 체험 온 모두가 바로 가입했다는 내용이 나를 설레게 했다. 따뜻한 사람들인가 보다! 조심스럽게 글 말미에 적혀 있던 오픈 채팅방 주소를 클릭해 들어갔다.

지금 나 실수한 것 같아

채팅방 공지에는 여러 가지 약속을 적어놓은 회칙과 회비 운영 내용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가입비 한 달에 2만 원? 싸네? 두 시간이나 공 차는데? 축구교실에 비하면 이건 거저야! 방에 입장하자마자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여성이고 초보인데 함께해도 괜찮은가요?"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본인만 괜찮으면 오시면 됩니다."
 

분명히 자기네들이 괜찮다고 했겠다? 좋았어. 신이 난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 팀에 입성했다.
 
콘과 사다리를 들고 집 근처 풋살장에 나와 드리블과 스텝 연습을 했다.
▲ 야간의 풋살장 콘과 사다리를 들고 집 근처 풋살장에 나와 드리블과 스텝 연습을 했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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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요일 밤 10시가 찾아왔다. 긴장한 탓에 너무 일찍 도착한 나는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운전석에 앉아 동태만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내렸다.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었다. 나이대는 3040쯤 되어 보이고, 서로 꽤 친밀한 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더니 한껏 쪼그라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나 지금 큰 실수한 것 같은데?'
 

구장에 들어서자마자 형광 핑크색 조끼를 건네받았다. 오늘 인원은 총 18명. 6명씩 삼파전을 치른다고 했다. 마초 향을 폴폴 풍기는 주장은 팀원들에게 "오늘 인원수가 딱 맞으니 중간에 집에 가면 죽인다?"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했다.

문제는 당시에 나는 축구 한 달 차였고, 18명 중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남자가 대부분인 줄은 알았으나 내 덩치 두세 배 남성 17명 사이에 여성 혼자 있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이게 뭐지? 혼성팀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 하나 여자면 혼성인 거야? 멘탈이 무너진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팀 아저씨들이 빨리 오라고 성화였다.

"바로 게임해요? 훈련 같은 거 안 해요?"
"훈련이요? 그런 거 없어요. 얼른 들어와요!"
 

신입은 패스라도 가르쳐주고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신입 환영이라며! 울며 따라 들어간 필드에서 나는 17명의 손흥민을 보았다. 저 몸놀림, 저 골 컨트롤 능력 대체 뭐지? 그러니까 나는 그냥 아저씨들 조기축구회에 입성한 것이다!
 
코치님이 훈련 준비를 하고 있다.
▲ 공과 사다리 코치님이 훈련 준비를 하고 있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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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날아다니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진로방해만 하다가 얼결에 공을 잡았는데, 17명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지면서 무서워서 공을 아무렇게나 내던졌고, 누군가 "풋" 하고 웃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마초 주장의 "중간에 가면 죽인다?"던 그 말이 생각나 도망도 못 갔다.

지금은 '택배 크로스'를 골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어찌저찌 전반전을 견뎠고, 쉬는 시간. 벤치로 가니 나와 함께 뛴 아저씨 5명은 기진맥진했다. 누구는 햄스트링이 올라오고 누구는 허벅지가 올라왔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당연하지, 6대 5로 대결했으니. 반면에 나는 주로 서 있는 역할을 맡아서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 그때 같은 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못해도 좋으니까 자신 있게 해요."
"아, 네네. 그렇죠. 머리로는 압니다."


그 아저씨는 나를 한번 쓱 보더니 구석으로 끌고 가 속성으로 패스, 드리블, 슛을 가르쳐주고 후반전에 재투입시켰다. 알고 보니 체육교육학과 출신이라고, 아동과 여성도 축구 가르친 적 있다고 했다. 다음 주에도 나온다면 자기가 콘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따뜻하고 고마운 제안인데, 당시에는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두 번째 투입 이후부턴 우리 팀 아저씨들이 나보고 내려오지 말고 골대 앞에 붙어 있으라고 했다. 심지어 한 골 먹히고 중앙 라인에서 시작할 때도 나보고 "내려오지 마요!"라고 소리쳤다. 아저씨들이 배달해준 공은 내 앞에 착착 와서 붙었다. 내가 드리블을 할 때 앞 수비가 잠시 난감해하더니 한 번에 빼앗아버렸는데, 경기장 안팎에서 그를 향해 온갖 야유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그에게 "막지 마! 막지 마아! 씨O!" 하고 짧은 욕설과 함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물론 그가 막지 않았음에도 나는 똥볼을 찼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공을 가지면 경기장 내 모든 사람이 일시 정지했다. 덕분에 두 골을 성공시켰고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날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 오픈 채팅방에 사과 인사를 건네고 꽁지 빠지게 퇴장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분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나 이후로 '여성 회원은 못 받는다'가 회칙에 새로 올라갔을까? 축구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라면 내 발 밑에 착착 배송되는 그 택배 크로스를 멋지게 골로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포털사이트에 해당 팀 이름을 검색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혹시 그날 같이 공 찼던 축구팀 여러분, 저 기억난다면 연락 주십시오. 이번엔 도망가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콘은 잔발 연습에 유용하다.
▲ 연습 콘 콘은 잔발 연습에 유용하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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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기축구, #축구, #여자축구, #생활체육, #풋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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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 두 권의 책을 낸 작가. 여성 아마추어 풋살선수. 나이 든 고양이 웅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풋살 신동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의 마음>,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두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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