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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험난했던 생애로 인해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 중에 『한성순보』1884년 5월 11일자에 쓴 「치도약론(治道略論)」은 그 시기 개화파 지식인의 대표적 논설로 읽힌다. 고종의 위임장을 갖고 일본을 몇 차례 다녀온 후에 쓴 글이다. 당시 그는 호조참판에 이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이었다. 논설의 주요 대목을 발췌한다.

평화적 시기에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법을 세우는 것이 귀중하나 전시에 적을 방위하는 데는 길을 잘 정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사변을 겪은 후에 폐하의 간곡한 교시가 한 번 내리자 고관들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각기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대책을 논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들의 의견을 보면 대개가… 빨리 조치하여 성과를 거두자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의견이 있는바 이 같은 의견을 자주 인군에게 제기하고 상하가 단결하여 좋은 의견을 실시한다면 오래지 않아 놀랄 만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재를 등용하며, 국가재정을 절약해 쓰며, 부화하고 사치한 것을 억제하며 문호를 개방하고 이웃나라들과 친선을 잘 도모하는 데 있는 바 이 가운데서 하나가 빠져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한 의견보다도 문제는 실사구시다.

오늘의 세계정세는 변화하여 만국의 교통은 대양을 통하여 실오리로 짜듯 덮였으며 금, 은, 석탄, 철 등의 개발, 각종 공작기계 등의 발명으로 인민들의 일상생활에 편리를 주는 허다한 시설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러기 위한 세계 각국에서 실시하는 정치의 요점을 찾아본다면 첫째 위생이요, 둘째 농상(農桑)이요, 셋째는 도로(道路)이다. 이 세 가지는 비록 아세아의 성현들도 이것을 나라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아 어길 수 없었다.

수십 년 이래 나쁜 질병들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유행하여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수천 수백 사람에게 전염되어 수다한 청년 장정들이 계속하여 사망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거처가 불결하고 음식에 절도가 없는 이유만이 아니라 더러운 오물들이 거리 복판에 쌓여서 그 독한 기운의 침습을 받기 때문이다.

이럴 때 부유한 자들이나 존귀한 자들은 약간 위생을 한다고 하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다만 화로에 향을 피우면서 주문을 읽는다. 귀신에게 비는 등 못 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의술을 조금 안다는 자들은 다만 병자를 피하려고만 하다가 부득이 병에 걸리면 당기고 밀고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요행수만 바라다가 환자를 고치지 못할 때는 언제나 한다는 말이 "금년은 운수가 그러니 할 수 없다"고 할 뿐이다.날씨가 좀 차지고 전염병이 좀 멈칫해지면 사람들은 다시 의기양양하여 기뻐하면서 지난날 일은 다 잊어버리고 만다. 어리석다고 할는지 슬픈 일이라 할는지 모를 일이다.

현재 구라파 각국에서는 기술의 종목이 매우 많으나 의술을 제일 첫 자리에 놓고 있다. 이것은 인민들의 생명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큰 관청으로부터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대문 앞뜨락은 질벅거리기가 도랑이나 다름없고 오물들이 뿜는 악취는 코를 막고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서 외국사람들에게 수칫거리로 되어있다. (주석 25)

주석
25> 『한성순보』, 1884년 5월 11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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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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