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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노동자로 여러 일을 경험했습니다. 편집자와 대리운전을 거쳐 현재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결국 노동조합이냐고요? 일 하는 사람들에게 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기자말]
모든 서비스업이 그렇듯 대리업계에도 여러 유형의 고객이 있습니다. 훌륭한 매너를 지닌 이부터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내뱉는 진상까지 다양합니다.

먼저 대리운전을 하며 만나고 싶지 않은 두 유형의 고객이 있습니다. 

경유콜과 주차장 뺑뺑이
 
몇 번이고 주차장을 도는 고객들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주차장을 도는 고객들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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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콜을 호출한 고객은 한 명인데 출발지에 도착해 보면 여러 사람이 차량에 탑승한 경우입니다. 십중팔구 최종 도착지 전 여러 곳을 들르는 '경유콜'입니다. 경유콜은 기본적으로 운행 시간이 길어집니다. 게다가 경유에 따른 요금이라도 제대로 주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이지요.

모든 운수업이 그렇듯 대리기사 역시 시간이 곧 돈입니다. 좋은 도착지의 콜을 잡아 가장 빠른 경로로 최단 시간 안에 오더를 완료하고, 대기 시간을 최소화하고 다음 콜을 잡는 것. 이를 효율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노동시간 대비 수입를 극대화하는 것이 이 노동의 핵심 전략입니다. 그런데 경유콜을 부른 고객은 보통 이리들 말합니다.

"가는 길이니 들렀다 갑시다."

단, 공짜로. 이 '가는 길'에 당해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대리기사 커뮤니티에서 업계 선배들이 얘기하는 "차 문만 여닫아도 경유"라는 격언의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주차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몇 번이고 주차장을 도는 고객들입니다. 자리가 없는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 주차 공간이 있는데도 원하는 위치에 차를 대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몇몇 대단지 아파트 주차장은 정말 광활합니다.

지하주차장에서 단지 외부로 완전히 빠져나오려면 족히 15분 이상 걸리는 데도 있지요. 이런 곳에선 주차장에 진입해 자리를 찾아 돌고, 차를 대고 다시 출구를 찾아 외부로 걸어 나오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만큼 일할(돈 벌) 시간이 줄어드는 셈이죠.

몇 년 동안 다른 사람의 차 수천 대를 대신 운전하는 동안 만난 몇몇 유명인들이 있습니다. 지면에서 실명을 밝힐 순 없으나 정치인, 배우, 방송인, 개그맨 등 다양합니다. 그중 인상에 남는 경험이 있습니다.

'호통 캐릭터' 연예인 A
 
호통치는 연예인을 만나 팁을 받았습니다.
 호통치는 연예인을 만나 팁을 받았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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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언론사와 방송사가 밀집한 서울의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서울 북서부의 콜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주로 상암동 주민센터 주변에서 콜을 '쪼며'(주시하며) 대기합니다. 주변으론 YTN과 SBS 그리고 MBC 등 주요 방송사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선 종종 방송 관계자들을 고객으로 만납니다. 개중엔 연예인들도 있지요.

어느 가을 저녁이었습니다. SBS에서 용산구 한남동까지 가는 콜이 스마트폰 화면에 뜨더군요. 단가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운행 시간 대비 단가만 보면 '똥콜'에 가까웠지요. 그래도 초저녁이었고, 도착지가 경리단길 근처여서 연계 콜을 노려보자는 생각으로 재빠르게 '콜 수락' 버튼을 터치했습니다.

콜을 잡고 통화를 하니 고객이 SBS 건물 로비로 오랍니다. 로비에서 고객을 만나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차량에 도착하니, 고객이 1층까지는 본인이 운전해 올라가겠답니다. 의아해서 "고객님이 가는 게 아니냐"라고 묻자, "다른 분이 가는데 1층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영국산 대형 SUV를 타고 1층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니 고객은 서 있는 한 남자를 가리킵니다.

"저분이 가실 겁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 연예인 A씨였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거친 말투를 쓰던 그의 캐릭터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A씨가 차에 오르자 (매니저인) 고객은 운전석으로 다가와 연신 "(A씨의 대리운전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기사 프로그램에서 '운행 시작'을 터치하고 자동으로 연동되는 내비게이션을 켰습니다.

"목적지까지 내비게이션 추천 경로로 가겠습니다. 혹시 다니시는 길이 있으면 미리 안내 부탁드립니다."

늘 출발 전 남기는 멘트와 함께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A씨는 평소 자주 다니는 길이 있는지, 원하는 경로를 미리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곤 여러 통의 전화를 하더군요. 전화는 주로 (후배로 보이는) 상대편에게 "술 먹고 집에 가는 길인데 술 한 잔 더하게 집으로 오라"고 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A씨는 여러 상대에게 장난스런 욕을 섞어가며 호통을 치며 대화 하더군요. 아이들이 센 척할 때처럼 말끝마다 욕을 붙여 대화하는 모습이, 좀 놀랍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습니다. 대중에 널리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 다른 사람(대리기사)이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저리 막말할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욕을 제외하곤 방송에서 본 캐릭터와 너무 똑같아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보통 방송 캐릭터와 본 모습은 다르기 마련일 것 같은데 A씨는 같더군요. 공적 세계의 모습과 사적 세계의 그것 사이에 일관성이 느껴져 오히려 호감이 갔습니다. A씨를 보며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진보연하는 지식인들과 셀럽들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날 것이지만 A씨에게선 최소한 '내로남불'의 악취가 나진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는데 A씨가 그 모습을 룸미러로 보고는 물었습니다.

"왜 웃어요?"

"방송이랑 너무 똑같아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똑같죠? 어디 가서 (나에 대해) 얘기하지 말아요."


A씨는 대리기사인 필자에겐 무례하진 않았습니다. 말투엔 A씨 특유의 까칠함이 있었지만 나름 정중했습니다. A씨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목적지인 한남동에 도착했습니다. 주차까지 끝내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A씨가 만 원을 팁으로 건넸습니다.

일관성 있는 연예인 A씨와 만남은 유쾌했고 덕분에 꿀콜을 탔다는 게 결론입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던 A씨의 당부를 들어주지 못한 셈인데, 그에 대한 미담이니 A씨도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태그:#대리운전, #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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