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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구한 말 매천 황현, 창강 김택영과 함께 '3대 문장가'로 알려지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어린 나이(15살)에 과거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정종의 아들 덕원군의 후손으로 강화도 사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산 군수를 지낸 이상학이고 할아버지 이시원이 병인양요(1886년) 때 순절하여 조정에서 정문을 세우고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의 선대는 이경직을 비롯하여 증조부 이면백 등 우뚝한 인물이 많으며 방계 역시 이광사, 이긍익 등 쟁쟁한 가문이다. 소론 계열의 맥을 이어오다가 영조 때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몰락하였다.

최연소자로 홍문관에 선임되고 고종 11년 왕명을 받들고 사절단으로 청나라 연경을 다녀왔다. 암행어사로 부패한 관리들을 탄핵하여 모략을 받고 관서의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곧 해배되어 통정대부, 지제교에 이어 경기도 안렴사를 지냈다.

함흥민란의 조사 책임을 맡았고 승지가 되었으나 반대파에 밀려 호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여러 차례 협판에 제수되었다. 시강관 등에 특진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해주부 관찰사에 임명하자 사직소를 올려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 고군산도에 유배되고 한 달 여 만에 사면되었다.

출퇴를 거듭하게 된 것은 강직한 성품으로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노론 계열의 핍박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무고함이 밝혀져 풀려났다. 그후 고종의 면전에서 직언을 했다가 신임을 잃게 되었다. 본인의 글이다.

하루는 민영익이 나를 불러 술을 마셨는데, 그 자리에 김공집·박영효·홍영식 등이 있었다 나는 민영익이 김홍립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 자기 주장을 떠받치려 한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알아차리고, 이에 우선적으로 김홍집의 얼굴을 보면서 그 죄상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황준헌은 기독교가 해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그대는 상소에서 황준헌은 척사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사람을 만흘이 여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에 김홍집은 겸양하여 사과했지만 민영익은 성을 내면서 술자리를 파했다. 그리고는 나는 조정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제가 여러 사람과 시사(時事)를 논했는데, 거만이 빗나가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 사람(이건창)이 비록 관직은 낮지만 문학을 잘한다는 이름이 자자합니다. 저 외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국세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이건창, <명미당시문집서전>)


그는 천성이 글쟁이였다. 당시는 문인으로 살아가는 방편은 관료가 되는 길이다. 사대부라 일컫는 대부분이 급제를 통해 관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총명한 군주를 만나면 빛을 발할 수 있지만 암군을 만나면 고난이 따랐다. 귀향한 이건창은 자신이 직접 겪었기에 나라의 고질이 된 당쟁의 폐해를 <당의통략>에 썼다.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에 의해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갈린 시절부터 영조의 탕평책으로 당쟁이 수습된 시기까지를 기술하였다.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는 데도 군주는 물론 조정대신들이 편 갈려 싸우는 참담한 현실을 공정하게 기술한 것이다. 당쟁 연구의 교본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원론>에서 붕당정치 원인을 적시한다.

〇도학(道學)을 너무 존중하였다.
〇명의(名義)를 너무 엄하게 여겼다.
〇문사(文辞)가 지나치게 번거로웠다.
〇형옥(刑獄)이 지나치게 조밀하다.
〇대각(帶閣)이 너무 준엄하다.
〇관식(官式)이 너무 맑았다.
〇벌열(閥閱)이 너무 성했다.
〇승평(昇平)의 세월이 너무 오래되었다.


야인이 된 그는 많은 시문을 지었다. <육신묘>, 사육신을 기리는 시다.

마침 내가 말을 내린 곳은
가을날의 노량진 포구
우러러 강 위의 언덕을 바라보니
흩어져 있는 묘소가 주위 나무 사이에 있네
한 번 절을 하니 풍도가 숙연해지고
두 번 절하니 눈물이 비오듯 나네
옛날의 비석을 지금도 읽을 수 있으니
성씨는 네 분이고 묘는 다섯 개이네
유성원의 묘는 무너지고 하위지의 묘를 옮겼으니
성씨는 아들에다가 아버지가 있네
이렇게 되면 7신이니
6신을 어찌 지목하여 헤아리리
그 당시에 육신이라 이름한 것은
보고 들은 것이 익숙한 데서 온 것이네. (하략)


'구한말의 3대 문장가'의 일원이고 이건창과도 가까웠던 창강 김택영에 대해 쓴 <이 시대의 시인은 창강 하나로다>에서 일종의 시론(詩論)을 편다. 시대를 넘어 글 쓰는 이들이 새겨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영롱하고 초묘(超妙)한 생각, 웅심(雄深)하고 헌걸찬 기상, 화려하고도 빛나는 색깔, 용용(舂舂)하고도 준려한 음쇠 격양하고도 돈좌(頓挫)한 절주(節奏), 유영(悠永)하고도 청소(淸疎)한 운치, 간아(間雅)하고도 유정(幽靚)한 자태 같은 것에다가 정신과 경치가 합쳐지면 감흥이 형상(形象)의 앞에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이미 어디서 왔는지를 헤아리지 못하게 되고, 자기 또한 그렇게 된 것을 모르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송희준 엮어 옮김,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건창)>)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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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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