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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에서 75세 사부에게 정원사 일을 배우는 65세 한국 제자의 이야기.[기자말]
때 늦은 큰 비가 내렸다. 가을철에 들어섰다 여겼는데 큐슈지역 이곳 저곳에 물난리다. 우리동네 쿠사노도 예외가 아니다. 동네를 관통하는 지방도가 물바다가 됐다. 저녁무렵 사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 6시까지 나와라.' 긴급 작업이다.

손질을 끝낸 수국 정원이 이번 비로 엉망이 됐단다. 다시 손봐야 하므로 급하게 연락을 했다고... 정원 수해복구 작업이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작업장비를 빌리러 갔다. 30분 넘게 걸리는 곳이다. 차 안에서 서로 말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주고받는 이야기가 풍성했을 상황인데 침묵만 흐른다. 사부가 졸리면 자라고 한마디 했던가.

수해 복구 1순위는 정원

도착해보니 소나무 전문 농장이다. 잘 손질해 놓은 그림같은 소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나무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다. 잘 생긴 수형에 크기도 다양하다. 적어도 몇 백년은 묵었음직한 적송 작품들이다. 사부가 고교 동창이라며 농장 사장을 소개해줬다. 큐슈 제일의 소나무 농장이라며 엄지를 치켜 세운다.

몇 년 전 이곳 농장에도 소나무 키우는 일을 배우러 한국 사람이 왔었단다. 그 사람이 1년 정도 있었는데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갔단다. 바빠서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는 걸 다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들렸다. 몇 대를 전해 내려온 이 농장의 고급 노하우니 1년 동안 그걸 다 배운다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수해복구 작업으로 분주하다
 마을 전체가 수해복구 작업으로 분주하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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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농장에서 '윤보'라 부르는 소형 포크레인을 빌렸다. 애들 장난감처럼 작고 아담한 장비다. 옛날같으면 전부 삽질로 처리해야 할 일들인데 기계를 이용한다. 인간은 기계없이 살지 못할 지경까지 와 버렸다. 삽질 세대는 이 상황이 생소하다. 

수국정원에 도착해 보니 엉망이다. 정원 바닥이 큰 물에 떠내려 온 모래천지다. 지난번 정원 손질때 함께 갔던 동네 친구분도 일손을 도우러 왔다. 셋이서 일단 건너편 밭에서 밀려 온 비닐 쓰레기부터 치웠다.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씨름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수해복구 작업으로 분주하다. 행정기관과 호흡을 맞춰 일사분란하게 대응한다. 집안 쓰레기와 토사를 길가에 내놓으면 시에서 치우고 도로 물청소까지 끝내는 식이다. 재해를 당했는데도 서로 웃으면서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일한다. 지진이 많은 땅이라서 자연재해에 단련된 사람들의 저력일까. 어려울수록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윗 동네는 산사태가 발생해서 사람이 상하기도 했다. 개울가 집들은 토사가 덮친 집이 한두 집이 아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다들 집 안의 다른 곳보다 정원을 먼저 손본다는 것이다. 그 집 안의 상징같은 장소라서 일까. 정원복구가 우선 순위다. 

오전 새참 쯤에 소나무 농장 사부 친구도 와서 합류했다. 사부가 장비 다루는 일이 서툴어 가르쳐 주러 온 거다. 그는 능숙했다. 마치 기계가 자기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며 요모조모 잘도 해치운다. 장비 몫을 한다. 작은 장비가 큰 일꾼이다.

나는 윤보가 실어주는 모래를 외발 손수레로 옮기는 작업을 맡았다. 초짜에다 젊은 몸이니 힘 쓰는 역할이 당연하다. 한낮에는 더워서 힘들었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하다. 삼복더위 동안 치열한 정원 작업으로 단련된 무적의 초짜정원사 아닌가. 

게다가 나는 머리를 굴리는 일보다 몸을 쓰는 걸 더 좋아한다. 땀 흘린 후 개운한 느낌도 즐긴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30년 동안이나 사무실에서 종이와 씨름하며 견뎠을까. 그때는 그런거 모르고 살았다. 먹고 사는 일이니 당연한 일상이었다. 

시키는 대로 안 한다며 쫓아온 사부
 
윗 동네는 산사태가 발생해서 사람이 상하기도 했다
 윗 동네는 산사태가 발생해서 사람이 상하기도 했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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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이 끝날 무렵 윤보 작업을 하던 사부 친구가 일정이 있다며 돌아갔다. 사부는 그가 골프치러 가는 거라고 귓속말을 한다. 그 친구에게 일정이라는 건 골프치는 일 뿐이란다. 오늘 또 비가 왔으니 그린에 물이 고여 시합이 중지됐을 텐데도 간다며 혀를 찬다. 아들에게 농장 일을 물려주고 골프나 치러다니는 친구가 내심 부러운 것이다. 사부 취미도 골프다. 이 동네는 골프가 일상이다.

사부는 농장주 친구만큼 윤보가 능숙하지는 못하다. 평소 안 하던 일이니 그럴 수밖에. 생각처럼 잘 안 되니 답답한 모양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에게까지 그걸 시켜보려고 했다. 레버 몇 개로 움직이는 간단한 구조라서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사양했다. 초짜라서 좁은 공간은 위험하니 나중에 넓은 곳에서 연습해보고 하겠다고 했다. 
  
내가 정원 바닥에 고여있는 빗물을 빼내기 위해 바닥을 삽으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정원에서 발생한 물은 남의 땅으로 가면 안 된다. 빗물도 하수도로 흘러 나가야 한다. 물이 남의 땅으로 가지 못하게 하면서 평탄 작업을 하려면 물을 막아야 한다. 

사부가 작업 지시를 하긴 했다. 지시한 대로 하면 물이 남의 땅으로 간다. 남의 땅으로 안 가게 하기 위해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건데... 이것저것 생각하며 머리를 굴려 작업하고 있는 중인데 윤보 작업을 하던 사부가 기계를 세우고 쫓아왔다.

화가 나서 쫓아 온 거다. 왜 시키는 대로 안 하냐는 거다.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다마레(시끄러)란다. 얼굴에 노기조차 띠었다. 여섯 달 동안 함께 일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며칠 전 비상사태의 원인이 이런 거였나. 의견을 얘기하려는 걸 사부는 거스르는 일로 받아들인다. 일하는 사람이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하라는 건가?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요모조모 잘도 해치운다.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요모조모 잘도 해치운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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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미씨도 말했었다. 분명히 잘못된 지시라도 사부지시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고구마 한 바가지를 물없이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해진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건 극히 비효율적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 데도 입을 봉해야 하니까. 

더 중요한 건 완성된 일의 품질이다. 시키는 대로 하면 자기 일이 아니라 사부 일이 되는 거다. 그대로만 해야 하니까. 이런 시스템은 발전이 없다.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부의 노기가 오래 안 간다는 거다. 금방 평상심을 되찾는다.

닥쳐온 상황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집 안의 다른 곳보다 정원을 먼저 손본다
 집 안의 다른 곳보다 정원을 먼저 손본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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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퍼붓지, 윤보는 맘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지, 노인네가 얼마나 답답했으랴. 그 판국에 시키는 대로 안 하는 제자가 눈에 띄었던 거다. 얼마전 백내장 수술까지 했으니 그게 또 얼마나 또렷하게 잘 보였으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하다. 

잘못된 일을 시키더라도 사부를 거스르지 마라. 이해할 수 없는 금언이지만 그걸 지켜야 한다는데 고민이 깊어진다. 일을 얼마나 합리적으로 처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제자란 그저 사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꼭두각시같은 존재가 되라는 거다. AI자동차가 거리를 주름잡는 대명천지에 이게 무슨 웃기는 짜장이란 말인가.

비상사태의 원인을 알게 된 계기라면 큰 수확이긴 하다. 문제는 전에는 사부가 이러지 않았다는 거다. 여섯 달 동안이나 잠잠하던 사부가 왜 갑자기 돌변했냐는 거다. 모든 것이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관계가 엉망이 되었다.

누구라서 미래를 알 수 있으랴. 때로는 알 수 없는 난폭한 힘에 휘둘려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 게 삶이다. 인간은 그저 발생한 사태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함으로 그 후회를 줄이려 노력하는 게 또한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 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일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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