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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한국천주교신자의 첫 순교자는 1791년 진산(珍山)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의 처형을 든다.

그들은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이를 계기로 이승훈·권일선·최필공 등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어서 1795년 을묘박해로 이가환·정약용·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당하는 등 천주교의 일대 교난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든 생활양식으로 삼고 주자의 학설에 어긋나는 일은 반역행위로서 사문난적으로 처벌했다. 우리 역사에서 조상을 받들어 제사지내는 유래는 고대사회에는 원시적인 샤머니즘에 의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였고 불교가 전성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에 의해 제사를 모셨다.

1700년대 후반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된 것은 제사문제였다. 전라도 진산군에 살던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1783년 25살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천주교도들이 모이는 명동의 역관 김범우의 집을 찾았다.

여기서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읽고서 이것을 붓으로 베껴 연구하고 3년 후에는 내종형인 정약전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1789년에는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시는 영광을 입었다.

귀국 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가지고 있던 책의 일부를 불사르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북경주교의 가르침에 좇아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위폐를 불살라서 그 재를 집안 뜰에 묻었다.

1791년 모친이 돌아가자 상주로서 모든 의식에 따라 장사를 지냈으나 위패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장례에 참석한 권상연도 같은 행동을 취하여 조문객들의 비난을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불효자로 지탄받게 되고 왕조에 대한 반역행위로 발고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곧 중앙정계로 비화되어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의 집을 수색하고 윤·권 두 사람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같은 기미를 알아챈 두 사람은 피신하여 체포를 모면했지만 관리들은 윤지충의 큰아버지를 대신 투옥하였다. 백부의 수감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이 해 10월 26일 진산군수에게 자수하였다. 그날 저녁부터 윤지충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28일 권상연이 역시 자수하여 수감되어 백부는 석방하였다. 두 사람은 29일 새벽 전라 관찰사가 있는 전주로 압송되어 심한 신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윤지충은 자수하여 신문을 받고 순교를 당하기 직전까지 과정을 수기로 남겼다. 다음은 수기의 요약이다.

10월 26일 저녁 무렵 진산군 관아에 도착, 저녁을 먹은 후 곧 신문을 받음. "너는 미신에 빠져있다는 소문인데 진실인가?", "아니요. 나는 다만 천주의 가르침을 받을 뿐이요" 천주의 진리를 말함. 관헌은 장례에 제물을 바치지 않은 일을 비난하고 공자의 말을 인용해가며 마음을 고쳐잡도록 권고하고 또한 고래의 명가인 윤씨 가문이 멸망하게 됨을 개탄하고 배교할 것을 권고했다.

"제가 배교의 의사가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천주교를 고집할 것입니까. 고난을 겪고 죽음으로서 진리를 얻는 것이 제가 행할 길이라…." 큰칼을 목에 채운 후 다시 하옥됨. 27일 아무 일 없었음. 28일 조식 때 권상연이 투옥되어 들어옴. 정오에 대인(代因)되어 있던 숙부가 출옥함. 일몰경 다시 끌려나가 이전보다 큰 칼을 씌우고 신문함. 전라도관찰사 정민시에게 압송되기로 결정하여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으나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킴.

29일 새벽에 병졸들에게 호위되어 출발, 전주감영에 이르자 밤이었으나 곧 성명·직업 그밖에 예비조사를 받음. 머리에 큰 칼과 손발에 철쇄를 채우고 하옥됨. 30일 재차 신문. "경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교는 미신이 아닌가?", "신은 최고의 아버지이며 천지 만물의 창조자임", 천주교를 신봉케한 사정, 서양책의 입수 경과에 관해 취조받음.

또 신주를 태운 일, 제물을 올리지 않은 것, 장례인들을 속인일에 관해 조사받음.
"서적을 숨기고 있으면 곧 제출하고 또한 동종자(同宗者)의 유무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라.

또 너희들 사이에 주교가 있어 사교(邪敎)를 전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저는 확실히 제물도 올리지 않았고 신주도 태웠으나 장례자들을 속이지는 않았습니다. 서적은 현재 소유치 않고 주교라고 불리우는 인물은 없습니다."

"너희들 천주교도들은 고난을 받고 종문(宗門)을 위해 죽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어떤가", "생을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 함은 인간의 통성입니다. 어찌 그럴 것입니까?", "너희들의 어제의 진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한 그 주장은 소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라고 생각된다.", "천주는 우리들의 아버지이며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다. 그런데 천주는 중국에서 상제(上帝)와 같은 것이며 인간은 천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다. 국왕에 대한 헌신, 부모에 대한 효행은 모두 천주가 명하는 바다. 사람들은 내가 모친의 사후 조문객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애도의 뜻을 표하고 또한 이를 받아들임은 인간으로서 의무인 것이다.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이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때 실제로 조의를 표한 몇 사람이 있으니 이를 확인해달라. 내가 모친을 매장하지 않았다는 소문은 5월에 돌아가신 모친을 8월에 가서야 매장의식을 올렸기에 생겨난 일이다."


조정은 두 사람을 배교시키고자 근신(近臣)을 옥에 보내 설득하고 신주를 모시면 고통을 면해 줄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들은 국왕의 인자함과 관대함을 충분히 이해하여 군부의 은혜가 하해와 같음을 느끼면서도 유일무이의 진리로 믿는 종교를 버리는 일과 신에 대한 부덕행위인 신주를 모시는 일은 단연코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1791년 11월 8일 두 사람에게 사형명령이 떨어지고 이와 같은 죄인을 낳은 진산군은 한때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이들은 11월 13일 형이 집행되었다. 다음은 구베아(Gouvea) 주교의 서한에 실린 사형집행 전말이다.

두 용사는 감옥으로부터 구경좋아하는 군중과 교도들이 보는 가운데 형장으로 옮겨졌다. 상연은 거듭된 고문으로 죽은 사람과 같아 간신히 예수와 마리아의 성명(聖名)을 불렀을 뿐이다. 지충은 형장을 향함이 마치 천국의 대향연에 초대받는 것 같이 환희의 얼굴로 나아가서 교도와 군중들이 경탄치 않을 수 없을 만치 위엄으로써 예수의 성명을 고창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집행관은 왕명에 의하여 배교하는 것을 맹세하고 조상의 신주를 규정대로 모시고 의례를 행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한 불응함을 알게되자 사형집행장을 낭독토록 수형자에게 명하였다.

윤지충은 집행장을 들고 기쁨에 떨면서 소리도 낭랑하게 읽었다. 읽고나자 그는 둥근 참수대에 목을 펴고 예수·마리아를 거듭 부르면서 태연작약하게 집행인에게 그들의 임무를 다하도록 일렀다. 집행인은 윤지충의 목을 끊고 이어 반사반생의 상태이면서도 예수·마리아를 읊조리던 권상연을 처형했다.

때는 1791년 12월 8일(양력) 오후 3시였다. 지충은 33살, 상연은 41살이었다. 국왕은 사형을 재가했음을 후회하고 그들이 차차 뜻을 굽힐 때도 있으리라는 일루의 희망을 안고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유죄(流罪)토록 하였으나 때늦어 사자가 도착한 것은 형이 집행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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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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