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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최양업(崔良業) 신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초대 사제이고 김신부가 사목생활 1년 만에 순교한데 비해 12년 동안 온갖 박해를 견디며 꾸준한 포교와 사목생활을 해 왔지만 최신부는 일반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최신부는 1836년 초 조선 입국에 성공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R) 신부에 의해 김대건·최방제와 함께 최초로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 6월 마카오로 건너갔다.

1년 만에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남은 두 사람은 1842년까지 신부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 이권을 찾고있던 프랑스 정부는 세실(Cecille) 제독에게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세실이 조선인 신학생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신학교에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행 직전에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면서 이 계획은 포기되었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기해박해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을 당한 직후라 여전히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문검색이 심하여 조선입국이 쉽지 않았다. 최초의 조선 신부인 김대건은 입국에 성공하여 선교하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조선 최초의 신부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최양업은 여러차례 입국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8년간의 수업을 마친 그는 1844년 12월 15일 신부가 되기 직전의 직위인 부제(副祭)의 신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길을 모색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최양업은 1846년 매스트르 이(李) 신부와 함께 국경 근처인 중국 훈춘을 거쳐 변문까지 왔다가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입국하지 못하고 해로를 이용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홍콩으로 건너갔다.

최양업은 이 해 5월 프랑스함대 클레오파트르호에 승선하여 8월 제주도를 거쳐 외연도 부근에 정박하였다. 이 함대가 조선에 오게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 때 살해된 프랑스 선교사 3명에 대한 책임을 묻고 조선과 통상관계를 맺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함대는 서해안 일대의 항해지도를 작성하고 정부에 보내는 봉서(封書)를 남긴 채 떠나가서 최양업은 상륙을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로인해 감옥에 있던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함대의 출현과 위협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9월 16일 순교하였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프랑스함대 두 척은 1847년 지난 해에 세실제독이 묻겠다는 편지의 회답을 요구하면서 다시 조선에 출동을 준비하였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로 이신부도 이 함대에 탑승을 허락받았다.

프랑스함대는 고군도(古郡島) 부근에서 풍랑으로 두척이 바위에 충돌하여 좌초하고 말았다. 560명의 인원 중 2명이 사망하고 해병들은 간신히 섬으로 상륙하였다가 한 달 후 구조선이 와서 상하이로 돌아갔다. 고군도에서 최양업은 섬주민들은 물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한문필답으로 통역을 맡았다.

한 달 동안 섬에 머물면서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 본국인과 한문으로 통문하였다. 만난 사람 중에는 예수교 신도가 한 사람 있었지만 감시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다. 최양업은 이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게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뒤에 마침내 들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사랑하는 포교지(布敎地)를 떠나서 상하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천주의 자비와 그분의 전능하고 자애로우신 섭리의 무한한 지략을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희망을 가질 것이며 주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려고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최양업신부의 서한>)

최양업은 프랑스함대를 이용한 입국을 포기하고 단독으로 해로를 통한 입국을 결심하였다. 1849년 마카오에서 중국의 작은 민간 배를 타고 백령도에까지 왔다.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닻이 찢기는 위험을 겪고 백령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의 페레옹 주교가 배를 보내어 육지에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지만 교우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민간배의 중국인 선장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다섯 번째 귀국의 노력을 포기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최양업은 백령도에서 상해로 돌아와 1849년 부활절 다음 주일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신부가 되었다. 서품을 받은 얼마 후 이제는 육로로 귀국하기 위해 요동으로 떠나 그곳에서 7개월가량 지내며 만주의 부주교이며 조선 교구장이 될 베르뇌 신부를 도와 활동하였다.

11월 초 입국의 길에 나섰다. 중국 변문에서 조선의 페레올 주교가 보낸 밀사를 만나 어렵게 관문을 통과하여 고국에 들어왔다. "하느님 팔에 의지하고 옥에 갇힐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밤에 관문에 가까이 갔습니다. 보통은 압록강변과 성벽 위와 성문에 보초들이 있었으나 밤은 아주 깊고 폭풍우가 몰아쳤는지라 바람이 세차고 추위가 심해서 군인들이 아마 집안으로 피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최양업신부의 서한>)

1849년 12월 서울에 도착하여 반년 동안 걸어서 5개도를 순방하며 선교에 열중했다.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는 가족과도 만났다. 이 기간에 신자 3,815명을 찾아보았고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3,815명에게 성체를 염해주었다.

3~4년 동안 본당(本堂)이 없이 전국을 다니며 전교활동을 하면서 교우촌(敎友村)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여전히 정부의 탄압이 심해서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최신부는 전교활동과 교우촌건설의 틈틈이 <사향가>·<사심판가>·<공심판가> 등 천주가사를 저술하고 <성교요리문답>을 간행하고 <사본문답(四本問答)>과 <연중주요기도서>를 편찬한 데 이어 7, 8종의 성서·신심서·교리서를 만들었다.

고국에 돌아와 12년 동안 온갖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하여 척박한 이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다. 외국인 신부나 주교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도맡아서 실행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861년 6월 자신의 사목상황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였다. 뿌르띠에 신부는 최신부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는 갑자기 티푸스에 걸려 거의 보름 여 일간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집은 나의 거처에서 백 십리 내지 백 팔십 리 떨어져 있어서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병세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그가 숨을 거두기 8~9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열성적으로 예수 마리아의 두 이름을 되풀이 하고 있었으므로 아직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똑똑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뿌르띠에 신부 서한>)

최신부는 1861년 6월 10일을 전후하여 순교와 다름없는 12년 간의 포교생활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라틴어·프랑스어·중국어 등에 능통한 사제였다.

최양업과 김대건 등 세 소년은 서품 후 평생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최방제는 풍토병으로 일찍 죽고 김대건은 입국 후 1년 만에 순교하고 최양업은 12년 동안 천주교발전에 헌신하다가 병사하였다.

최양업의 사후에 19통의 라틴어 서한이 발굴되었다. 주로 프랑스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이다. 최신부의 서한은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즉 양반제도가 교회에서는 분열을 초래하고 국가로 볼 때는 인재등용을 제한하는 '악의 근원'이라 평가하면서 이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주장하였고, 조선에서 자유로운 선교를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어야 하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정부가 조선정부에 적극적인 외교활동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모든 분야에서 '1등주의'만을 추구해온 한국사회는 두 번째 천주교 사제 최양업신부의 고난과 헌신을 잊어왔다. 그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된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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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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