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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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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언로(言路)를 막으려 든다. 바른말과 글을 차단하고, 아부에 능한 간신배들의 곡필과 아첨에는 솔깃해한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탄압하고 어용배는 중용하거나 보상한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이런 독재자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을 비판하던 진보신문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그 신문사 사장인 조용수를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서둘러 처형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과거에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 때문에 미국의 신뢰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신분 세탁, 즉 자신이 좌익이 아니라 반공주의자라는 사실을 과시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언론(인)에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속셈이었다. 여차하면 때려잡는다는 협박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의도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4·19 혁명 이후 언론의 자유를 만끽했던 신문들이 5·16 쿠데타 이후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보호막을 쳤다.
대학을 떠난 이희승은 1962년 2월에 <소경의 잠꼬대>(일조각)라는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의 첫 수필집이었다. 수필 문학에서도 일가를 이룬 이 대목은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그는 이 해 3·1절 기념행사장에서 건국훈장(단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공적을 평가받은 결과였다.

7월에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조국관을 심어준다는 명목으로 한 달 동안 일본을 다녀왔다. 문교부가 김성식(고려대), 한태연(서울대), 정인섭(중앙대)과 함께 이희승도 연사로 위촉되어, 도쿄를 비롯해 일본 주요 도시 10여 곳에 들러 강연하고 동포들의 삶을 살폈다.

해가 바뀐 1963년 8월에는 뜻하지 않는 감투를 받았다. 본인이 몇 차례나 거절했으나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8월 나는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한평생을 교단에만 몸담아 온 딸깍발이 서생에게 신문사 사장이란 당치도 않은 외도인 셈이다.

어느 날 동아일보 상임감사 신기창 씨가 찾아와 "사장을 맡아 주어야겠습니다" 했다.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사양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언론에 대해서는 지식도 경험도 능력도 없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고는 못 살아요. 동아일보의 발전을 위해서나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안 될 말이오."

내가 워낙 딱 잘라 사양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돌아갔다.

며칠 후 신 감사가 다시 찾아왔다. 또 거절하여 돌려보냈다. 세 번째로 찾아온 그는 김연수 씨의 뜻임을 밝히고 꼭 맡아 주어야겠다고 떼를 쓰다시피 했다. 김연수 씨는 김성수 씨의 친아우로 당시 동아일보사의 주식을 반 이상 가진 대주주였다.

나하고는 동갑이어서 청년 시절부터 사귀어 온 데다가 젊은 시절 그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는 고학생들을 여럿 도왔는데 내가 경성제대를 다닐 때도 예과를 포함해서 꼬박 5년 동안 내 학비를 대 주었다. 그래서 거절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잘 말씀드려 달라는 말을 하고는 온양 온천으로 도피했다. 8월 1일에 나는 온양 온천에 머물고 있었는데 석간신문에 동아일보사의 주주총회에서 이희승이 사장이 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주석 1)

본인의 표현대로 '외도'를 한 셈이다. 그동안 교수로서 학문을 연구하고 저서를 집필하는 일에만 오롯이 매달려 온 그에게 신문사 사장은 생뚱맞은 직업이었다. 언론계가 시련을 겪던 시기였기에 신문사 측으로서는 그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았고, 지명도도 있고, 학문적인 업적도 뛰어났기에 이런 것들을 평가하여 초빙했을 터이다.

이희승은 시간이 지난 뒤에 한 인터뷰에서도 신문사 사장을 맡은 것은 '외도'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것이 완전한 타의요, 외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평생을 교단에만 몸담아 온 딸깍발이 서생에게 신문사 사장이란 저 자신이나 주위의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동아일보의 간부 한 사람이 찾아와 사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나이도 많지만 언론에 대해서는 지식도, 경험도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평소의 지론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이나 사양했는데 네 번째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더구나 지난날의 구연도 있어서 결국은 사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을 내리고서도 나는 내가 죽을 때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주석 2)

그는 성격상 무슨 일이든 책임을 맡으면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그가 사장이 된 뒤에 신문사는 쇄신되었고, 발행 부수도 크게 늘었다. 그 대신 정권의 각종 탄압과 보복이 뒤따랐다.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보니 신문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보였다. 간부들은 고자세였고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다. 내가 솔선해서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니까 다른 간부들도 시간을 지키게 되고 신문이 시간에 맞추어 나오게 되었다. 나의 임기 중에 군정이 끝나고 민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동아일보가 옛날 일제 시대의 기자정신으로 돌아가 기사를 쓰자 신문 부수도 늘고 신문사가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받아서 편집국장 집에 폭탄이 날아들고 나에게도 협박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공수부대원들이 밤에 회사를 습격해서 윤전기를 부수려고 기도한 사건도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 공화당 정권은 이런저런 언론법을 만들어서 언론의 자유를 탄압했다. (주석 3)


주석
1> <회고록>, 231쪽.
2> 박현태, <일석 이희승>, <신문과 방송>, 1977년 7월호.
3> <회고록>, 23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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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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