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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2023년 여름,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각궁(角弓)'과 첫 인연을 맺었다. 아무래도 낯선 활이 익숙치 않아 초반에는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날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동안 카본 활(탄소섬유 소재)과 화살에 익숙해져 있다가, 재료와 형태가 다른 활을 잡으니 아예 새로운 활쏘기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고수만이 '각궁'을 쓸 수 있다는 오해와 편견
 
처음 각궁을 쏘던 날 (충주 탄금정)
 처음 각궁을 쏘던 날 (충주 탄금정)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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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각궁을 쓰네?"
"자네 몇 단인가?"


각궁을 들고 지방 활터를 돌아다닐 때마다 종종 사람들로부터 받는 질문이다. 

현대식 카본 활이 점령하다시피 한 국궁장에서 각궁을 잡는 사람들 자체가 소수인데, 더군다나 젊은 사람이 각궁을 쓰는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왔을 법하다.

'단'을 묻는 것은 현재 대한궁도협회에서 5단 이상 승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각죽(각궁+죽시)을 쓰도록 한 규정 때문이다. 각궁 자체가 카본 활에 비해 다루기 까다로운 터라, 굳이 5단 이상 도전하는 이들 아니고서는 처음부터 각궁을 잡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각궁으로 활쏘기를 하고 있으니, 아마 내가 각궁으로 승단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미 승단한 재야의 젊은 고수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저는 단이 없는데요"라고 대답하면 대개 당황하는 반응들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대한궁도협회의 이러한 규정은 전통을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러한 규정 덕에 카본 활이 지배하고 있는 전통 활터에서 각궁의 전승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래서인지 4단까지는 으레 카본 활로 승단하고, 5단부터는 각궁으로 바꾸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종종 "각궁은 4단 이상은 돼야 쓸 수 있다"고 초심자들에게 겁을 주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이런 발언은 규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와 편견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국궁 입문 당시의 나 역시 정말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4단 이상은 돼야 각궁을 써야 한다는 규정은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또 실제로 각궁을 잡아보니 단의 유무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도 몸소 깨달았다. 

오히려 카본 활과 각궁은 그 느낌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언젠가 각궁을 잡을 거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시작하는 게 맞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카본 활이 없던 시대에 태어난 옛 조상들은 처음부터 각궁을 잡았을 것 아닌가.

한편으로 카본 활이 더 맞히기 쉽기 때문에, 카본 활로 우선 딸 수 있는 단까지는 따두고 규정대로 5단 심사부터 각궁을 쓰는 게 어떠냐는 조언도 종종 듣곤 한다. 목적지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멀리 돌아가느냐는 핀잔과 함께.

그러나 나는 이 길을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본 활과 각궁은 그 구조와 쏨세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명궁이 되고 싶다면 일찌감치 각궁으로 길을 들이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현명한 판단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단증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활쏘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저 즐기면서 실력을 키우다보면, 승단이란 것은 언젠가 따라오기 마련인 것 아닐까.

각궁이 왜 좋냐 묻는다면
 
전통 각궁의 아름다운 곡선 (한산도 제승당)
 전통 각궁의 아름다운 곡선 (한산도 제승당)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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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 활을 보통 '개량궁'이라고 부른다. 단어 자체가 각궁의 단점을 개량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가 적절한 표현인지 의문이다.

각궁 자체가 카본 활보다 좋은 점도 있기 때문이다. 전통 각궁의 가장 큰 장점은, 활을 쐈을 때의 충격을 활이 흡수하기 때문에 내 몸으로 돌아오는 충격이 적다는 것. 그러니 몸에 무리 없이 편안하게 활쏘기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시위를 걸고 푸는 과정이 매우 단순하며, 활의 형태 역시 항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카본 활과 달리 각궁은 활을 올리고 내리는 과정이 조금은 복잡한 편이다.

그러나 나의 '손길'에 따라 활의 형태가 잡히는 것을 보면 일종의 성취감마저 든다. 프라모델에 비유해보면, 완제품보다는 분해된 상태라 할 수 있겠다. 분해 상태로 구입하여 시간을 들여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이, 완제품을 샀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각궁을 올리는 기자의 모습 (서울 공항정)
 각궁을 올리는 기자의 모습 (서울 공항정)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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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중에 '막만타궁(莫彎他弓: 남의 활을 당기지 말라)'이라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남의 재산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라는 뜻으로 해석하기 쉽다.

사실 이 말은 각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각궁은 내 쏨세, 즉 자세에 맞게 세팅을 하기 때문에, 나와 쏨세가 다른 사람이 당기면 바로 활이 뒤집히면서 부러질 위험이 크다. 각궁을 쏜다는 건 내 쏨세에 맞게 내가 직접 세팅한 활로 쏘는 것이기에, '나만의 시그니처 활'을 쏜다는 일종의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전통을 계승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활터에서 각궁을 쓰는 이들이 소수라는 사실부터가 이미 전통에 대한 계승이 흐려지고 있는 현상인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각궁을 고집하고 있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문화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진짜배기' 전통활쏘기 배우고 싶다면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개인적으론 '진짜배기' 전통활쏘기를 한다고 말하려면 각궁을 잡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활과 화살로 활쏘기를 해야 비로소 '전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릴 때 신나게 가지고 놀던 '탑블레이드' 팽이를 가지고 팽이치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민속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카본 활이 발명된 후 전통 활터에서도 편의성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레 각궁 제작 기술이 많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지역별로 특색 있는 각궁들이 제작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각궁을 잡는 이들이 줄어들수록, 그나마 남아있는 각궁 제작 기술도 전승이 끊기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과거 함흥본궁에 소장되어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각궁 및 화살. 지금은 소재 불명이다. 사진 속 형태의 활을 제작하는 기술도 실전되었다고 한다.
 과거 함흥본궁에 소장되어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각궁 및 화살. 지금은 소재 불명이다. 사진 속 형태의 활을 제작하는 기술도 실전되었다고 한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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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감과 사명감을 갖고 각궁에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궁극적으로 전통활쏘기를 제대로 즐기고 계승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태그:#활쏘기, #각궁, #국궁, #활, #공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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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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