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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대문 형무소.
▲ 서대문 형무소 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대문 형무소.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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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와 <근현대사>의 집필에 열중하던 1983년 12월 말 예기치 못한 또 한 차례의 환란이 닥쳤다. 연말의 몹시 추운 날 이번에도 저승사자들이 찾아와 "잠깐 가자"는 것이었다.

'귀양살이'중이어서 이렇다할 행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번에 잡혀간 곳은 민주인사들이 연옥으로 부르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로 더욱 악명 높은 남영동 소재 경찰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취조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그 해 봄 조승혁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실시하는 중·고등학교 교사들 대상의 교육과정에 초청되어 <민족분단과 통일과정의 역사적 배경>이란 제목의 강의 내용이 문제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미 반년도 넘은 일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이미 분단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6.25전쟁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우리 땅에서는 전쟁통일은 불가능하며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각각 상대방의 처지와 체제를 인정한 위에 통일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취지로 강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주석 1) 

취조관들은 여러 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진술서를 강요했다. 사실대로 적으면 내용이 부실하다고 찢고, 다시 쓰도록 하는 수법으로 '진술서 고문'이 거듭되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 쓰다 보면 차라리 육체 고문을 당하는 편이 났겠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달 여 동안 신문을 받다가 1984년 초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야말로 우리 근현대사의 또 다른 현장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근현대사 전공자로서 한때나마 그곳에 수용되었던 것은 역사현장의 답사나 성지순례를 한 것이라 자위할 수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문민독재시기 및 군사독재시기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 섰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는가, 이곳의 식구가 되어보지 않고도 한 많은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구치소 생활이 그다지 괴롭지만은 않았다. (주석 2)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면서 전국 각지에 감옥을 지었다. 초기에는 의병학살에서 보이듯이 현장에서 학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 같은 만행이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북돋우고 국제사회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방향을 바꾸어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등 감옥을 짓고 수감하였다.  

일제시대 수많은 의병과 항일지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김구·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 그리고 1919년 3.1항쟁을 주도한 손병희·한용운·권동진 선생 등 민족대표와 수천 명의 민중이 이곳에 갇히고 유관순 열사, 김동삼 선생, 김우규 의사가 여기서 옥고를 치르거나 생을 마감했다.

해방 후에는 한때 최남선 등 거물 친일파들이, 그리고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항일경력의 국회의원들이 수감되고, 4.19혁명으로 최인규 등 자유당 간부가, 5.16 쿠데타 후에는 민주당 정권 각료와 혁신계, 반혁명사건 연루자들이 무더기로 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시국사범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된 양심수들로 온통 감옥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주석 3)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표시의 붉은 딱지가 붙은 수의를 입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독방에 갇혔다. 3사 하층 8방이고 수인 번호는 30번이다.

"한 평이 채 못되는 넓이의 방 한쪽에 뚜껑 덮인 변기가 있고, 복도 쪽에는 세끼 밥을 넣어주는 구멍과 쇠창살문이 있었다. 4면 벽에는 앞서 거쳐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로 어지러웠다." (주석4)

회유가 따랐다. 강연 내용을 분석해봐도 혐의를 만들기 어렵게 되자 회유에 나선 것이다.

어느 날 검찰청에 불려갔더니 이건개 공안부장이 중국요리를 대접하면서 법정에 가서 통일문제를 두고 논쟁해봐야 국가적으로 이익될 것 없으니 불기소로 그냥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부당하게 구속하고 온갖 핍박을 해놓고 통일문제의 '법정논쟁'을 우려한다면서 풀어준 것이다. 3개월 만이었다. 

강만길은 뒷날 <서대문형무소에 스민 역사>라는 사론을 썼다. 한 대목이다. 

독방에 들어앉게 되면 이 별난 세계 속의 주민들에게마저 남다르게 보이는 존재가 되었음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출입문과 뒤창은 찢어진 비닐로 겨우 가려졌고 영하 18도의 추위가 1주일씩 계속되어도 불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감방에 빨간 딱지 피의자라 하여 혼자 넣어지고 나면 한 평 남짓한 방이 시베리아 벌판만큼이나 황량해진다.

이 벌판에 던져졌던 당초의 긴장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4면 벽을 둘러보면 이미 이 방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남긴 크고 작은 흔적들이 눈에 띈다. 시덥잖은 것들이 많지만 역사라는 것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이 방이야말로 우리 근현대사의 한 부분임을 실감하게 하는 흔적들도 더러 있다. (주석 5)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267~268쪽.
2> 앞의 책, 274~275쪽.
3>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8~19쪽, 나남출판, 2000.
4> <역사가의 시간>, 273쪽.
5> 강만길, <서대문형무소에 스민 역사>, <역사를 위하여>(강만길 저작집 10), 70쪽, 창비, 201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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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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