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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낭만적' 여행으로 제목을 삼은 것은 보통 철원은 비운의 도시, 거기를 가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애써 이런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고의로 붙인 것이다. 낭만적이라고까지 하면 비판을 받을지 몰라도 이제 우리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

궁예의 한이 서려 있을 것만 같은 곳 그리고 땅굴, 백마고지, 민통선, 주인 잃은 철모, 녹슨 기차 등 우리들 가슴을 무겁게 하는 낱말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곳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철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금강산에 심취했던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오가다 들러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三釜淵瀑布(삼부연폭포), 아치형 모습을 하고 있는 承日橋(승일교), 옛날에 임금까지 와서 노닐고 아직도 임꺽정이 살아 숨쉬고 있는 孤石亭(고석정) 그리고 호족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到彼岸寺(도피안사) 등은 본래 철원의 모습을 말하여준다.

▲ 철원입구에 있는 표지 돌/금강산 76km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 김정봉
철원에 접어들면 '금강산 76km'라 표시되어 있는 큰 표지 돌이 세워져 있다. 금강산이 거리 상으로나 마음속으로도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별도로 서울-철원-금강산 장안사-원산을 잇는 철도가 있어 철원이 분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삼부연폭포

철원에서 제일 먼저 들를 만 한 곳은 삼부연 폭포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겸재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이 머문 곳이다. 김창흡은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지만 모두 사양하고 평생 철원 삼부연, 설악산 영사암 등지에 몸을 숨기며 지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었고 그가 추구한 시의 세계는 진경시였으니 겸재의 진경산수는 스승의 예술정신을 그림 세계에서 구현한 것이기도 했다.(화인열전1 에서 인용) 김창흡은 금강산을 좋아하여 생애 6번을 금강산에 다녀왔는데 겸재도 그의 영향을 받아 금강산에 심취한 끝에 생애 대작인 금강전도를 그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겸재는 금강 2차 기행 때 돌아오는 길에 철원 삼부연도를 그리게 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겸재의 다른 작품을 보면 능히 상상하여 볼 수 있다.

▲ 삼부연폭포 전경
ⓒ 김정봉
▲ 여산폭포도/국립박물관
ⓒ 김정봉


삼부연 폭포는 물줄기가 세 번 꺾어져 떨어지며 가마솥 같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겸재의 폭포 그림 중에 폭포 위쪽이 굽이쳐 돌려져 있는 여산폭포도가 비슷하지 않을까? 삼부연을 그림으로 감상해 보면 좋겠다는 욕심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승일교/고석정

고석정으로 가다 보면 뜻밖의 멋진 다리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차가 다니는 다리는 따로 있고 그 옆에 운치 있고 제법 오래 돼 보이는 다리가 승일교다. 아치형으로 한탕강의 수려한 풍광과 잘 어울리는데 '승일교'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얘기가 있다.

▲ 승일교/아치형이 운치가 있다
ⓒ 김정봉
그 한가지는 김일성이 짓기 시작해 이승만이 완성해서 승일교라 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순직한 박승일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이 유력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던 남북이 반반씩 만든 아름다운 다리임에는 이견이 없다.

승일교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철원 제일이 명승지인 고석정이 있다. 고석정은 신라 때는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 노닐었던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이 수려한 풍광과 더불어 고석정을 유명하게 한 것은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고석바위
ⓒ 김정봉

그런데 어떻게 이 곳이 임꺽정과 관련되었는가에 대한 유래는 없다. 다만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의 중간 부분에 임꺽정이 은신하였던 자연석실이 있고 강 건너편에는 석성이 남아 있어 임꺽정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 고석정 전경
ⓒ 김정봉

고석정 입구에는 임꺽정 상이 고석정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 있지만 이 고장 사람들의 믿음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밉지 않게 다가왔다.

▲ 임꺽정 상/고석정 풍광과 어울리지 않지만 밉지는 않다
ⓒ 김정봉

도피안사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곳이 다 있었네"라고 감탄을 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로 하여금 철원을 다시 찾게 하는 도피안사로 향했다. 도피안사 방향으로 길게 나 있는 길 양 옆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예쁜 장흥초등학교가 보인다. 그 뒤 멀리 아직 잔설이 보이는 산이 보이고 철새들이 북쪽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떼지어 날고 있다.

장흥초등학교는 가을이면 더 예쁜 모습을 한다. 노오란 은행잎과 붉은 벽돌....앞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고 멀리 보이는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든다. 철원을 얘기할 때 더 이상 '비운'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 도피안사 가는 길/멀리 예쁜 학교가 보인다
ⓒ 김정봉

길을 재촉하여 도피안사에 다다를 즈음 오른쪽으로 철원미곡종합처리장이 있다. 바로 직전에 지나쳐온 길 왼쪽으로는 동송미곡처리장이 이것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철원은 강원도 쌀 생산의 1/6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미곡 처리장이 있다는 것이 금방 이해가 간다. 철원미곡처리장 벽면에는 아주 조그맣게 의미 심장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

농업은 생명창고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 나라가 돌연히 상공업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 농민독본중에서-


▲ 철원미곡종합처리장/최전방 청결미가 유난히 크게 보인다
ⓒ 김정봉

미곡처리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도피안사가 나온다. 도피안사라,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한 절 집. 고석정에서 오는 길이 우리 속인에게는 피안의 세계 같다. 예쁜 학교, 알맞게 높은 산, 철새들의 군무, 넓은 평야, 넉넉한 곡식....속세를 넘어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곳 말이다.

도피안사는 865년(경덕왕 5) 당대의 고승 도선국사가 1,500여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새로운 조류의 선사상이 유행처럼 번져 지방호족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되던 때였다.(답사여행의 길잡이 9 경기북부와 북한강에서 인용) 이 곳의 삼층석탑(보물223호)과 철조비로자나좌불상(국보 63호)은 이런 호족문화의 산물이다.

▲ 삼층석탑
ⓒ 김정봉

삼층석탑은 세련미 보단 촌스러운 미가 흐르는데 마치 시골 총각이 바짝 쳐 올린 머리에 바지는 배꼽까지 끌어올려 입은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불상은 어떤가? 철원 호족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인상을 풍기고 철불에 금분을 입혀 촌스러운 멋을 더해 준다.

▲ 철조비로자나좌불상
ⓒ 김정봉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을 보는 즐거움에 취해 도피안사의 현대판 보물을 놓치기 쉬운데 요사 뒤에 연꽃무늬로 한껏 멋을 내고 기와로 예쁘게 쌓아 올린 굴뚝같은 것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일러실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보일러실이 또 있을까?

▲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일러실이다
ⓒ 김정봉


▲ 기와연꽃/진짜꽃 보다 더 예쁘다
ⓒ 김정봉

돌아오는 길에 미곡처리장을 다시 한번 보았다. 농업은 생명창고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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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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