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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2~3월이 되면 철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2003년과 2004년에는 3월 초에 다녀왔고 금년엔 2월말에 다녀왔다. 이때가 되면 남쪽에서 봄소식이 전해진다. 묘하게도 이때쯤 철원에 가고 싶어진다. 철새가 겨우내 머물다 봄이 되면 북으로 돌아가듯 남쪽의 봄기운을 타고 가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생리적 현상인 듯싶다.

▲ 철원에도 봄은 서서히 다가오고...(2004.3.02 고석정에서 촬영)
ⓒ 김정봉
2003년 글에서는 고의로 '낭만적 여행'으로 제목을 달았지만 지금은 정말 '낭만적 여행'을 하게 된다. 처음에 그 글 제목을 '철원으로의 낭만적 여행'으로 올렸는데 '낭만적인 철원으로의 여행'으로 바뀌어 실리었다. 그 때만 해도 철원을 낭만적인 곳으로 쓰기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 감히 철원을 낭만적이라 쓸 수 없었는데 편집부에서 과감히 그렇게 고쳐 주어서 고맙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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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철원으로의 여행

이제 겨우 '낭만적인 철원으로의 여행'으로 제목을 달 수 있다. 낭만적인 곳이 아닌 곳을 가면서 낭만적인 여행이 가능하겠는가. 철원은 두 점의 '촌스런' 문화재를 갖고 있는 도피안사가 있고 한탄강이 휘돌아 가면서 빚어 놓은 여러 비경이 있으며 근래 들어 지어진 다리 중 가장 멋진 다리인 '승일교'가 있다.

▲ 철원평야(2004.3.02에 촬영)
ⓒ 김정봉
철원하면 백마고지, 삽슬봉이 있는 산악지역으로 알기 쉬우나 맛 좋은 쌀을 생산하는 철원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특히 철원 쌀은 맛이 좋고 비싼 가격으로 팔리면서 최근 들어 꾸준히 재배면적이 늘어가고 있다. 철원은 슬픈 역사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비운의 도시가 아닌 것이다.

▲ 철원은 조그마한 창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노동당사에서 촬영)
ⓒ 김정봉
철원 길은 의정부, 포천을 거쳐 운천으로 가는 길이 있고 의정부, 동두천을 지나 연천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연천으로 가는 길은 얼마 전까지는 신탄리에서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연천 길은 번화하지 않아 그럴싸한 가게가 드물고 냇가를 따라가면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기찻길이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길가의 투박한 손두부집에서 모두부나 손칼국수를 먹기도 하고 운 좋게 길 옆 마을에 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시골 장터도 구경하면서 갖가지 농산물도 사고 맛있는 장터국수를 먹을 수 있는 낭만적 길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인 대광리를 지나면 곧 신탄리역에 닿는다. 예전의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버리고 예쁘게 단장한 역이긴 하지만 역의 풍경이 주는 정감은 그대로 살아 있다. 현재 운행 중인 경원선의 종착역이다. 경원선은 신탄리를 통과하여 북의 평강을 거쳐 원산까지 이어지는 철로인데 철원은 남북이 갈라지기 전에는 원산과 금강산으로 갈라지는 길목이었다.

신탄리에서 철원방향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4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백마고지 전적지, 직진하면 월정역·천통리 철새도래지, 우회전하면 노동당사·도피안사 가는 길이다. 여기에서 길을 몰라도 주저할 것 없다. 왜냐하면 오른쪽 말고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뼈대만 앙상한 노동당사를 왼쪽으로 두고 길을 재촉하여 얼마 가지 않으면 도피안사. 이름 또한 특이하다. 피안이라,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경지를 말한다. 군인들이 지키는 초소와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노동당사 등 마음을 짓누르는 풍경을 벗어나 나타난 절집이라 더욱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 도피안사, 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절집이라
ⓒ 김정봉
도피안사는 대적광전과 그 옆 요사채 건물이 전부였으나 천왕문, 삼성각, 범종각 등 몇 채의 건물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고 있다. 보통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 시야를 가려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새로 들어선 건물들은 시야를 가리지 않고 늘어서 있어 오히려 아늑해 보인다.

▲ 최근 새로운 건물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고 있다
ⓒ 김정봉
화개산을 뒤로 하고 앞에 펼쳐진 훤한 풍경도 볼거리지만 도피안사 최고의 볼거리는 삼층석탑(보물 223호)과 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 63호)의 파격미다. 모두 이 절이 세워진 865년(경문왕5)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불상과 관련한 이야기로 추측해 보면 불상이 먼저 제조되고 석탑이 나중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도피안사 정경, 철불과 석탑으로 허약한 화개산의 산세를 보했다는 비보사찰이다
ⓒ 김정봉
불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당시의 철원의 아저씨를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감춰진 묘한 힘이 느껴져 그 당시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긴 얼굴에 입가가 약간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어 위엄이 있다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준다.

▲ 철조비로자나좌불상,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든 것 같다
ⓒ 김정봉
불상의 얼굴은 한 가지만은 아니다. 도피안사의 불상처럼 철원 지방의 호족의 자화상을 보기라도 하듯 힘 좋은 아저씨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서산마애삼존불처럼 오가는 길손들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는 어린애의 순진한 미소를 갖고 있기도 한다. 강릉 신복사터의 석불처럼 이가 다 빠져 곶감을 물고 있는 듯한 할머니의 얼굴을 한 불상도 있다. 불상의 모습은 그 때 그 때 달라서 불상이 만들어진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불상을 제조하는 목적과 지역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 서산마애삼존불
ⓒ 김정봉
▲ 신복사터 석불좌상
ⓒ 김정봉
도피인사에는 또 하나의 '촌스런' 볼거리가 있다.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촌스럽다고 하였지만 9세기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문화에서 지방호족문화로의 힘의 이동과정에서 나타나는 개성적인 호족문화로 이해하면 되겠다. 세련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이 흐트러진 것 같기도 하다. 옆으로 벌어지지 않고 키만 훌쩍 커버린 중학생인 나의 첫째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애정이 더욱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삼층석탑, 균형미·세련미보다는 파격미가 돋보인다
ⓒ 김정봉
이 절이 세워진 유래는 흥미롭다. 도선국사가 철불을 만들어 수정산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승려들과 함께 암소 등에 싣고 먼 길을 재촉하여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 마루터에 도착하게 되었다. 해는 저물고 승려들과 암소 역시 지쳐 있었다. 이들이 이 고개 마루터에 잠시 쉬는 동안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암소 등에 실렸던 불상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승려들이 당황하여 찾아 헤맸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았다. 한 스님이 지금의 도피안사 자리에 이르렀을 때 그 불상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도선국사는 이 불상을 안양사에 모실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왜 본래 모시려고 했던 안양사에 철불을 모시지 않고 새로운 절을 지어 도피안사에 모셨을까? 여기서 재미있는 추론이 가능하다. 철불 뒷면에 1500명의 향도가 결연하여 조성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 당시 1500명의 숫자는 대단한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권력이동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새로운 절의 이름도 도피안사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모든 힘이 동원되어 성대하게 조성된 철불이 있어야 되는 절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모셔졌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 절의 이름도 도피안사라 하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도선국사는 이 자리에 철불을 모시고 절을 창건하게 된다. 도선국사는 비보(裨補)풍수를 주장하였는데 비보풍수는 흠 있는 땅의 운명을 인위적인 힘을 가해 약한 곳은 돋우고 보충하여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드는 풍수를 말한다. 도피안사가 위치하고 있는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어서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였다 한다.

대적광전 뒤편 화개산에 오르면 뒤로 철원평야가 한없이 펼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로 막힘이 없었던들 이런 평야에 기대어 큰 마을이 생겨났을 것이고 도피안사는 마을에 사는 어린애들의 좋은 소풍장소가 되었으리라. 태백선 눈꽃열차처럼 경원선금강산관광열차를 타고 가다 달우물역(월정역)에 내려 잠시 도피안사를 볼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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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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