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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요. 이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목을 메던 한 여성이 세 번의 실연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결국은 노처녀가 되는 과정'을 명쾌하고도 편협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남자들이 원하는 건 독립적인 여자가 아닌, 오로지 예쁘고 어리고 조건이 좋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한 여자의 오디세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한편 많은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던 자유롭고 세련된 이미지의 뉴욕이, 지금 이곳 한국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그다지 칭찬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편협하거든요. 주말에 시간을 내서 뮤지컬을 보러 온 여성 관객분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쌓일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입니다.
 
수동적 여성의 이야기, 아직도 통할까?
 
뮤지컬의 주인공인 데니스는 엄청나게 수동적인 여성입니다. 런던에서 남자에게 차이고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 접근해오는 세 명의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지만 또 세 번 다 실연 당합니다. 그 과정에서 데니스가 한 일이라곤 그저 상대방 남자의 호의에 응답하거나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 해내는 일은 전혀 없어요.
 
심지어는 뉴욕에서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사는 건지조차 모호합니다. (이 점은 극 전개에 있어 불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암시는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세 번의 실연과 엄마가 보내온 비디오를 통해 변화를 다짐하지만 그 변화 뒤에도 그녀의 외침은 그저 '또다른 사랑을 기다리는 것'일 뿐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내니 다이어리>류의 칙릿 문학(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작품 등을 일컫는 신조어)과 <섹스 앤 더 시티> 등에서 등장하는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가 존중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어째서 이 정도로 수동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는지 참 의아할 정도입니다. 신데렐라를 꿈꾸는 현대 뉴욕 여성이라니, 맙소사예요.
 
모든 노래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라는 유명한 작곡가가 썼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부터 <캐츠>, <오페라의 유령>까지 엄청나게 유명한 뮤지컬들의 작곡을 맡은 사람이죠. 네임밸류에 걸맞게 노래들은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당히 경쾌하고, 적당히 애잔해요.
 
하지만 애써 대중적인 요소를 가져다 쓰려는 시도탓인지 약간 식상한 느낌도 없지 않았습니다. 뮤지컬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대충 만든 팝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 뭔가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곡가가 큰 작품 사이사이에서 머리 식히기용으로 살짝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모노드라마를 소화할만한 연기력, 글쎄...
 
이 뮤지컬은 모노드라마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데니스의 시점으로만 진행되죠. 모노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역량인 것이 당연합니다. 총 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며 한 번씩 공연을 하는데요.
 
제가 관람했을 때의 주인공은 김선영이라는 배우였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가창력에, 풍부하고 자연스런 표정과 제스처. 그다지 흠잡을 만한 점은 없었어요. 하지만 모노드라마를 맡기엔 그 카리스마가 조금 역부족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큰 흡입력이 없었습니다.
 
몇년 전에 배우 서주희의 모노드라마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가운데 혼자 떡하니 앉아, 오로지 독백만으로 극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자칫하면 지루해지기 쉬운 형식이었지만 훌륭하게 소화하더군요. 그 흡입력, 그 카리스마란…. 아무래도 모노드라마를 소화해내려면 역기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더 필요한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기했던 점은, 스스로 움직이는 무대 소품들이었어요. 거대한 무대장치 밑에 조그마한 바퀴를 달고 몇 명의 스탭들이 낑낑거리며 끌어대는 소극장의 풍경들을 많이 보아온 저로선, 마치 유령처럼 혼자 스윽 나타났다가 스윽 사라지는 소파와 침대들이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두산아트센터, 뮤지컬보다 이 공연장 자체가 더욱 감동이었어요.

태그:#뮤지컬, #텔미온어선데이, #모노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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