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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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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는 현행 대입수능시험의 외국어 영역 대신 2013학년도 대학입시부터는 말하기와 듣기 위주의 새로운 영어능력평가시험(일명 한국식 토플·토익)으로 대입을 치르게 된다고 밝혔다. 또 올해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고교생이 되는 2010년부터는 전국의 모든 고교에서 영어 몰입 교육이 시행되도록 할 방침이라고 한다.

아울러 영어 이외 수학, 과학 과목도 영어로 수업하게 되는데, 이 '영어 몰입교육'은 올해 안에 새 정부가 처음 도입하는 '기숙형 공립고'와 '자율형 사립고'에서 우선 시행한 후 일반고교로 확대 실시할 예정이란다.

어떤 교과든 성적에 반영되는 순간 서열과 경쟁이 생겨난다. 그것도 어느 대학에 진학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인생이 결정되는 입시 구조 속에서 영어 몰입 교육론이 주는 파장은 걷잡을 수 없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책에 일선 교사들의 반응 또한 냉담과 조소로 일관되고 있다.

"에이~! 교직 생활 그만 두라는 거로구먼!"
"어허! 괜찮은 영어학원이 어디랴?"
"영어 학원 노 났구먼!"
"앞으로 교무회의도 영어로 하자구!"

"인수위 사람들은 영어로 회의하것쥬?"

영어 몰입 교육론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푸념들이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이런저런 사회적 합의도 없이 밀실에서 밀어붙이는 인수위의 교육 정책에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20년 국어교사, 영어학원 다녀야 하나?

나는 20년째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다. 2010년 이후 국어 수업도 영어로 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영어 학원부터 등록해야 할 상황이다. 영어 잘 하는 제자를 찾아 '신 청출어람'이라도 시도해야 한다. 국어 사전보다 영어사전을 애용해야 하고 영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야말로 영어에 몰입하며 교단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중3,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내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영어 몰입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서너 차례 측정해서 대입에 반영한다는데 당장 실력 있다는 외국인 강사들이 수두룩한 외국어 학원을 알아봐야 할 터다.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외국 유학 보내겠다는 학부모는 얼마나 넘쳐날까? 이래저래 건강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인수위는 진정 인간 수명조절 위원회인가?

영어라는 것! 꼭 하고 싶은 사람만 하게 하라. 성적에 반영하고 대입에 적용하는 순간 영어 교육의 진정성은 훼손된다. 내가 47년 살아오는 동안 영어 때문에 고통 받은 건 아무 것도 없다. 지난 20년 동안 아무 탈없이 학생들과 교감해 왔다. 학창 시절 배운 영어만으로도 현재 내가 누리는 생활에 불편을 느껴본 적이 없다.

국어 선생인 내가 왜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초보적인 개념조차 인수위 관계자들은 잊고 있단 말인가!      

출신고별 대학 합격 인원 공개에 초중고 학업공개까지?

지난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때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한 수험생들이 시험시작을 앞두고 두 손을 모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때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한 수험생들이 시험시작을 앞두고 두 손을 모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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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 대학들이 출신고별로 신입생 인원을 공개토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단다. 초·중·고교의 학업 성적도 공개하도록 하겠단다.

자꾸만 자꾸만 비평준화 시절로 회귀하자고 한다. 그래서 신문마다 서울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순서대로 고교 이름을 매겨 보자는 거다. 이 반교육적 처사를 놓고 그 동안 언론이 자정하여 그나마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중인데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자는 해괴망측한 발상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수험생 줄 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 초·중·고교 서열까지 매겨 공개하자는 것은 비틀어진 시장주의요, 우리 교육에 대한 폭거다. 묵묵하게 오직 한 마음으로 제자를 사랑하며 교단을 지켜온 수많은 교사들에 대한 파렴치한 행위요,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다.

폭거요, 파렴치요, 횡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르친다는 것의 결과는 성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성적을 잘 내기 위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간을 기르기 위해 존재한다.

교사의 한 시간은 작품이어야 하고 학생의 한 시간은 감동이어야 한다. 이 작품과 감동의 관계를 성적으로만 환산하는 것은 저급한 장사치들의 사고다. 학생은 교사의 수업을 기억하지 않고 교사를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제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키우며 끊임없이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교사다. 학교별 학업 성적 공개는 우리 교사들의 존재 이유마저 훼손하는 단세포적 만행이다.

학생도 교사도 학교도 줄세우겠다니...

학생도 줄 세우고, 교사도 줄 세우고, 학교마저 줄을 세워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인수위가 과연 정상일까? 학교 현장 교사들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은 채 그들만의 안하무인격 정책으로 일관하는 것은 성직의 기본을 모르는 유아발상이다.

교직은 성직이다. 이 성직의 기본은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인수위의 교육 정책이 개성, 창의성 발현을 위한 교실 수업 개선이라면 환영하겠으나 영어 추종 수업으로 일관하라니 절망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우리말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영어로 들이대며 상호작용하는 것은 우리 교육을 포기하고 폐기하는 행위다.   

얼굴은 사람 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행동이 몹시 흉악하다는 단어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인 경우다. 인수위는 진정 인면 수심 위원회인가?

숨이 찬다. 꼭 이렇듯 알량한 언어유희로 글을 써야만 하다니 껄쩍지근하고 찝찝하다. 이 껄쩍지근하고 찝찝한 마음을 영어로 몰입하여 표현하면 무엇일까? 그토록 정겨운 우리만의 사투리는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까? 그 많은 방언에 담긴 우리만의 정서는 영어에 밀려 태평양에서 표류하게 될 것이다. 

영어에 몰입하고 교사와 학교를 줄 세우면 경제가 살고 공교육이 정상화되는 걸까? 자꾸만자꾸만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인수위는 정녕 인간 수명조절 위원회인가, 인면수심위원회인가?


태그:#인수위 교육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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