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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미국과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자 민심이 꿈틀거렸다. 정부가 대미 관계 때문에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식품을 무리하게 들여오려고 한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정부를 비난했고, 거리는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들로 뒤덮였다. 정부는 결국 민심에 굴복했다.'

이제는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은 2008년의 촛불 시위 얘기를 왜 다시 꺼내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날마다 거리를 뒤덮은 시위대를 보며 혀를 차던 이들에게는 MBC <PD수첩>의 '광우병 선동질'에 온 국민이 놀아난 것으로 기억되는 그 사건 말이다. (작년 6월 검찰이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자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사회적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라고 공격했고,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은 "<PD수첩>이 미국 쇠고기가 수입되면 광우병에 걸려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처럼 주장했지만 지금 광우병 얘기가 어디 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위 이야기는 한국이 아니라 대만 얘기이다. 지난 두 달간 대만을 뜨겁게 달군 '광우병 파동'이 대만 정부의 협상 파기로 마무리돼서 미 무역대표부가 격분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국제뉴스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가 워낙 다이내믹한 곳이라 아무리 뜨거운 이슈라도 금방금방 까먹는 속성도 있을 것이다.

두 달간 대만을 뜨껍게 달군 '광우병 파동'

2008년 5월 31일 저녁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촉구하는 24차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낮 부터 수천명의 네티즌들이 서울광장에 모여 '이명박 탄핵'을 외치고 있다.
 2008년 5월 31일 저녁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촉구하는 24차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낮 부터 수천명의 네티즌들이 서울광장에 모여 '이명박 탄핵'을 외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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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후유증을 안겨줬던 사건의 '변주곡'이 우리와 그다지 멀지않은 대만에서 다시 울려 퍼졌는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한번쯤 들여다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작년 10월23일 대만 위생서(우리나라로 치면 보건복지부)는 월령 30개월 미만의 미국 소에서 나오는 뼈 있는 쇠고기와 내장, 척수 등을 수입하는 의정서에 서명했다. 대만 정부는 2006년 이래 미국산 뼈 있는 쇠고기의 수입 금지 방침을 유지해 왔는데, 그러한 방침을 갑자기 바꿔버린 것이다.

여론이 악화된 것은 대만 정부가 2008년 한국이 미국과의 추가협상에서 얻어낸 것보다 못한 조건의 협상을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월령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라도 뇌·눈·척수·머리뼈 등 4개 부위는 수입자가 주문하지 않았다면 검역 과정에서 반송하도록 했지만, 대만의 경우 뇌와 척수까지도 수입을 전면 허용했다. 20개월 미만 뼈 없는 쇠고기만 수입하는 일본의 사례도 대만 정부의 굴욕 협상에 대한 국민감정에 불을 지폈다.

협상 내용보다 국민들을 더 격분시킨 것은 협상 과정이었다. 야당인 민진당은 "2006년 1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을 완화하기 전에는 정부가 입법원과 협의하고 재가해야 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작년 11월14일에는 정부의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도 수도 타이페이에서 열렸다. 온라인 사진공유 커뮤니티 사이트 '플리커' 회원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한 것은 우리나라 누리꾼들의 오프라인 활약에 비견된다.  

대만의 영자일간지 <타이페이 타임즈>가 다음날 조간신문에 보도한 현장의 발언들을 음미해보자.

"정부는 국민이나 야당, 입법원(국회)과 이 문제를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부가 미국과 합의에 이른 후에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이는 민주주의와 투명성 원리를 저해하는 것이다. 정부가 재협상을 안 하겠다면 그들이 물러나고 우리가 해야할 것이다." (야당 민진당의 차이잉원 주석)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도 걱정되지만 정부가 국민들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의정서에 서명한 것이 더 화가 난다.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얻은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림정첸, 32세)

"나는 살만큼 살아서 광우병에 걸리든 말든 상관없다. 하지만 내 손자들을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 (익명의 50대 여성)

"나는 마잉쥬 총통의 열렬한 지지자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가 잘못하는 것을 못본 체 할 수 없다." (탕 가오슈안펭)

여론이 들끊는 동안 대만 정부가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잉쥬 총통은 10월 28일 국민당의 중앙선거단 발족식에서 "국민의 건강 보호가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어떤 국가와도 협상하지 않는다"고 말문을 열었는데, 이는 "어느 나라가 자기 국민에게 해로운 고기를 사다 먹이겠냐"(2008년 5월8일)고 한 이명박 대통령의 수사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

"이미 협의가 완료돼 재협상이 어렵다. 검역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양츠량 대만 위생서장(11월2일 기자회견)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을 그토록 강조하던 우리나라 관료들의 모습을 그대로 판박이한 것 같다.

마잉쥬 총통과 이명박 대통령 발언이 비슷하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2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최근 쇠고기 파문에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앞서 인사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2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최근 쇠고기 파문에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앞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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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투표 청원자 수는 대만 유권자의 1%가 넘는 20만 여명에 달했고, 12월 6일 지방선거에서는 지리멸렬하던 야당 민진당의 득표율이 45.3%로 급상승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민심 이반'을 체험한 여당 국민당은 부랴부랴 야당과 협상을 벌여 향후 10년간 광우병이 발생한 국가의 쇠고기 중에서 내장·분쇄육·뇌·눈·머리뼈·척수 등 6개 부위를 수입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의 식품위생관리법 개정안을 지난 5일 입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제 한국과 대만의 차이점을 얘기할 차례다.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진정국면이 되자 촛불시위 세력을 때려잡는 우리 정부에 비해 대만 정부가 그나마 민심을 받드는 모양새를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우선 대만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는 여당이 재협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대만식 해법의 가장 큰 특징은 입법권을 쥔 여당이 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국 정부의 협상 결과를 사실상 뒤집어버렸다는 점이다. 집권 국민당은 입법원 113석의 3/4에 육박하는 81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다. 친여성향의 군소정당 몇 군데를 합치면 개헌도 할 수 있고, 1/3에 불과한 민진당(27석)은 안중에도 없을 법도 한데 국민당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의 일부 의원들은 위생서의 예산 삭감을 무기로 입법원의 동의 없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해제한 위생서장의 사임을 요구했다. 국민당 독재 38년(1949~87)에 진저리를 느끼는 국민들에게 과거의 악몽을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일 수도, 12월 지방선거에서 예상외의 타격을 입은 것이 여당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식품위생관리법 개정 작업에 참여한 여당의 4선 의원은 "행정부는 외국과 합의서에 서명할 권리가 있지만 민의의 대표들은 새로운 민의가 생기면 당파를 불문하고 모두 민의를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농무부와 무역대표부의 공동성명을 통해 "대만의 조치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책임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대만의 신뢰를 해치게 될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지만, 대만 입장에서는 의회가 앞장섬으로써 정부가 져야할 협상 파기의 책임을 어느 정도 덜어준 셈이다.

2008년 여당이 "국회 개원이 안됐다"는 핑계를 대며 뒤로 빠지는 사이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불법폭력세력'이라고 공격하는 촛불시위대가 정부의 추가협상 동력이 된 것은 역설적이다.

주목 받는 여당 소속 타이페이 시장의 행보

집권 국민당과 별개로, 여당 소속 타이페이 시장인 하우룽빈의 행보도 파격적이었다.

 하우룽빈 타이페이 시장은 대만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자 타이페이 식당가에 '쇠고기 불매' 스티커를 직접 붙이고 다녔다.
ⓒ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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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식품공학을 공부하고 대만 국립대 교수를 지낸 그는 협상 3일만에 "광우병 바이러스는 고온에서도 파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며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미국 쇠고기 판매를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구 230만 도시의 시장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스티커를 시내 식당들에 배포하고 "다른 지자체도 타이페이처럼 해주길 바란다"고 미국산 쇠고기 불매 캠페인을 독려했다.

그는 "대외 협상은 정부의 몫이지만,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시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우룽빈 시장은 마잉쥬 총통에게도 사전에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여기에 대한 총통부(우리나라의 청와대) 반응은 어땠을까? 대만의 영자일간지 <차이나포스트> 10월27일자에 따르면, 총통부의 고위관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재협상 불가'를 고수하면서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킨다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담담하게 사태를 받아들였다.

반면, 2008년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여당 소속 국회의원·단체장들은 어땠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그해 4월21일 "(미국 쇠고기를) 강제로 공급받는 게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적게 사면 되는 것"이라며 "개방하면 민간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무신경한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해 7월8일 국회에서 '미국 쇠고기 등심 스테이크' 시식회를 했다. 일부 의원은 "한우보다 맛있다"고 축산농가를 자극하는 말을 했다.

"정부가 하는 일에 입장을 내기에는 너무 이르다"(오세훈 서울시장), "정부가 철저한 대책을 내놓을 때"(허남식 부산시장), "답변하기 곤란하다"(김진선 강원지사)는 식으로 '눈치보기' 답변을 내놓는 단체장들도 적지 않았다. (2008년 5월20일 <경향신문> 설문조사)

2008년 쇠고기 파동을 온몸으로 겪었던 청와대의 내심은 어떨까?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난해 12월29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대만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미국 쇠고기를 수입했는데, 2008년 반대하던 사람들이 대만 협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한다. 광우병이 창궐해서 1년에 몇 명 죽는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냐"고 반문했다.

해가 바뀌고 대만 의회가 쇠고기 협상을 뒤집은 것에 대해 다시 의견을 묻자 이 관계자는 "당분간 칩거할 생각"이라며 말문을 닫았다.

민주당은 6일 "미국과 다른 나라들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언제라도 미국에 협정 개정을 요구하겠다"는 한승수 전 총리의 2008년 5월8일 대국민담화를 언급하며 정부에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이마트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수입육 코너에 진열된 미국산 쇠고기.
 서울 용산구 한강로 이마트용산점에서 시민들이 수입육 코너에 진열된 미국산 쇠고기.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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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만, #쇠고기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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