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음은 추도가를 부르겠습니다." 사회자 박세열의 말에 임실경찰서 앞 신작로에 운집한 군중 수천 명이 코를 훌쩍이며 노래를 불렀다. "산에나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울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이어서 문병학의 죽음을 추모하는 박훈의 추모시 낭송이 이어졌다.

전북 임실군이 만들어진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1946년 11월 중순, 이날 장례식은 전주형무소 탈옥사건 주도자인 문병학이 미군에게 사살당하자 마련된 '임실 사회장'이었다.

문병학은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처음 밝힌 '정읍발언(1946.6)' 항의 집회를 주도하다 체포돼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전주형무소 재소자 800명 중 상당수가 10월 항쟁 관련자였다. 1946년 11월 11일 오후 2시경 재소자 413명이 탈옥했다. 경찰은 인근을 3일 동안 수색, 293명을 자수시키거나 검거했지만, 나머지 탈주자 120명은 끝내 붙잡지 못했다(김양희, 「1949년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 연구」, 2004). 문병학은 이때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양경인,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은행나무).

문병학의 장례식 사회는 박세열(1913년생)이 보고, 추모시와 추도가는 박훈(1919년생이 짓고 낭독했다. 임실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에서 중도에 퇴학당한 박세열은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그의 장인 구한영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박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자란 문학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박준창(1890~1962)은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정필조 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3.1운동을 주도, 대구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민족주의 성향의 박준창은 해방 후 임실군 인민위원회에서 활동을 했다.

대쪽 같은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 박훈은 시와 문학에 흠뻑 빠진 예술가였다. 연극과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 1946년 연극 <봉선화>의 각본을 쓰고 배우로 출연했다. 그는 화롯불에서 고구마가 익어가는 밤새 여동생 박선애(1927년생)·박순애(1930년생)에게 푸쉬킨, 발자크, 톨스토이, 고리키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날 장례식의 백미는 장지로 가는 상여 행렬이었다. 상여가 앞장서고 수백 장의 만장이 뒤를 이었다. 그의 묘는 임실역 앞산에 썼는데, 한동안 임실역에서 내리는 학생과 주민들은 으레 그의 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의 스러진 꿈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조선에서 단일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처음으로 제시한 이는 몽양 여운형(1886~1947)이었다. 그의 꿈은 좌·우와 남·북이 하나가 되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해방 후에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한 여운형에 대한 조선 민중의 지지는 뜨거웠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선구회가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여론조사에서 그는 이승만, 김구를 제치고 단독 1위에 올랐다.

그가 김규식과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 해방 후 보름만인 1945년 8월 말 기준으로 145개의 지부가 만들어졌다. 전북 임실에도 건준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박세열도 참가했다.

또 박훈의 집안에서는 아버지 박준창이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박훈은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 참여했다. 훗날 검사와 변호사가 되는 박세열의 집안 동생 박세영(1916년생)도 임실건준 산업부 차창으로 취임했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제10권』, 1973). 

하지만 해방 후 좌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한 남조선에서 여운형이 설 땅은 없었다. 여운형은 1947년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절된 지 얼마 안 된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당해 세상을 떴다. 여운형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박세열의 상심은 크고 깊었다. 1년 후인 1948년 7월 19일 여운형의 서거 1주기에 그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서울로 추도식을 다녀왔다. 그날 밤 임실역에 도착한 박세열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됐다 다행히도 이삼일 후 풀려났다. 

경찰에게 항의한 9세 소녀
 
박세열 구복순 부부
 박세열 구복순 부부
 

"우리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나쁜 사람이에요." 9세 소녀는 겁도 없이 임실경찰서 서천수(가명)에게 대꾸했다. 아버지의 식사를 가져온 박봉자에게 독설을 내뿜은 서 형사에 대한 당찬 대꾸였다. 서형사가 박봉자에게 "니 아부지는 나쁜 사랑잉께 밥 주지 마라"고 악담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임실경찰서 사찰과 형사가 또다시 박세열을 연행한 때는 1948년 10월 20일이었다. 하루 전에 있었던 10월 19일 여순봉기에 따른 예비검속이었다. 미군정의 횡포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도 4.3 항쟁과 제주도에 파병 명령을 거부한 여수 14연대 군인들의 봉기 이전에도 임실에서 좌우 무력 충돌은 있었다. 

남로당과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주도한 1948년의 2.7 사건이 그것이다. 2.7 사건은 UN 하 남조선만의 총선에 반대한 정치 파업으로 임실에서는 성수지서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2월 25일 좌익청년이 이끄는 시위대 500여 명은 성수지서에서 3km 떨어진 삼청리 회치골에 집결했다. 시위대는 죽창과 농기구로 무장하고 성수지서를 습격했는데,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7명과 경찰 2명이 사망했다. 병력을 증파한 경찰은 주민 287명을 연행했다.(임실군지편찬위원회, <임실군지>, 1997)

주모자 엄현섭은 붙잡혀 대전형무소에 구속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에서 학살당했다. 박세열 역시 이 사건으로 임실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져야만 했다. 때문에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임실군은 요주의 인물을 대거 예비검속했다. 대상은 박세열과 박훈을 비롯한 20여 명으로 이들을 잡아들인 이는 서천수를 포함 친일경찰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10월 26일 딸 박봉자는 등에 3살 동생 박삼남을 업고 임실경찰서로 면회를 갔다. 손에는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이 들려있었다. 어머니 구복순은 막 막내를 출산해 집에 있어야 했다. 가뜩이나 경찰서 출입이 무서운 봉자에게 아버지를 잡아간 형사가 악담을 퍼부어대니 봉자는 무섭기만 했다. 봉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엄마가 남동생을 낳았어요"라고 전했다. 박세열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아버지 박세열은 경찰서 안에서 펼침막을 쓰고 있었다. 명필이었던 그는 유치장 신세를 지면서도 펼침막을 쓰거나 서류를 작성하는 일에 동원됐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임실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의 공부의 신이었다. 1928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와 <매일신보>는 '임실공립보통학교 6학년생 박세열(16세) 군이 (전북)도지사가 주는 우량아동 표창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임실군 박세열이 전북도지사에게 아동표창을 받았다는 매일신보 기사
 임실군 박세열이 전북도지사에게 아동표창을 받았다는 매일신보 기사
 
집안 동생 박세영은 "형이 늘 1등을 도맡아, 나는 2등밖에 못했어요"라고 생전에 증언했다. 박세열과 박세영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2등밖에 못한 이가 검사와 변호사를 한 것이다. 박세열은 바둑과 마라톤에도 능했다.

1948년 12월 1일 예비검속 당한 박세열과 임실군 청년들은 뒷결박을 한 채로 경찰서 뒷문으로 끌려 나갔다. 구금된 지 42일 만의 일이었다.

당시 임실경찰서 옆에 살았던 문성규(1940년생)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하는데, 경찰들이 흰옷 입은 이들을 뒷결박 지우고 용수를 씌워 경찰서 뒷문으로 데리고 가 트럭에 태웠어요." 그들은 임실군 오수면 말티재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생후 7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증언자 박봉자(박세열의 딸)
 증언자 박봉자(박세열의 딸)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한편 박세열이 트럭에 실려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최수덕과 아내 구복순은 발을 동동 굴렀다. 5일 후인 12월 6일 임실경찰서 경찰이 박세열 집에 찾아왔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 보고서>) 사찰과 형사는 박세열의 옷과 혁대, 회중시계를 놓고 갔다. 그 물건이 외동아들 것임을 확인한 어머니 최수덕은 기절했다. 잠시 후 깨어난 그녀는 대성통곡하며 "이놈들아 내 아들 어디서 죽였냐!"라고 부르짖었다.

경찰은 유품은 건네주었지만 그가 학살된 장소는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 시신을 찾기 위한 아내 구복순의 노력은 처절했다. 신생아 박왕업을 업고 눈물바람을 하며 정신없이 다녔다. 결국 신생아는 영양실조로 1949년 5월 전주 화성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전주형무소 용도과장이던 박세열 동창 윤갑준은 신생아를 형무소 근처 야산에 매장해주었다. 

전북 임실군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을 치렀다. 어떤 이념과 가치와 정책을 지닌 신생 조국을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좌와 우가 경쟁했다. 그러다가 좌우와 남북이 하나되어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세력들은 빨갱이로 몰려 공권력에 의해 제거됐다. 박세열과 박훈 역시 그들 중 하나이다.
 

태그:#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성수지서 습격사건, #예비검속, #여순사건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