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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야 확인했어요. 아까 편지 여러 번 쓰기 싫다고 막 투덜거린 거 죄송해요. 제 맘은 그게 아니었는데 두통 땜에 머리도 아프고 날씨도 막 덥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죄송해요!!!!!

며칠 전 생일을 맞이한 한 아이가 보내온 두 번째 편지 내용입니다. 아이의 생일은 9월 3일이었고, 메일이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9월 2일 22시 00분 19초였습니다. 생일시를 받으려면 최소한 두 번은 메일을 보내야 한다고 했더니 마감(?)을 불과 두 시간 앞두고 두 번째 메일을 보내온 것입니다.

9월 2일 종례시간이었습니다. 다음날이 생일인데 메일을 한 번밖에 보내지 않는 아이와 이런 식으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어제 답장 보냈는데 아직 못 읽었지?"
"예. 아직요."
"오늘 집에 가자마자 답장 써야 돼. 선생님도 생일시를 써주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
"또 써요?"
"또 써요라니? 적어도 두 번은 써야 한다고 했잖아."
"두 번씩이나요?"
"쓰고 싶지 않으면 말든가. 나도 시 안 쓰면 편하니까."


사실 아이들과의 사이에 이런 식의 대화가 자주 오고가는 것은 아닙니다. 생일을 앞두고 한 달 넘게 편지를 주고받은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다 보면 외견상 철없이 보이는 아이들도 나름대로 깊은 속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의 감추어진 성숙함과 만나고 싶은 것이 제가 생일시를 빙자해서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려하는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일 전날 밤에 받는 아이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습니다.

드디어 몇 시간 뒤면 제 생일이에요 선생님. 내일은 조금만 놀고 집 들어가서 엄마한테 미역국 끓여드려야겠어요. 예전에 처음 끓였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미역을 막 물에 넣었다가 너무 많아서 다 버리고 두 번째 끓일 때는 너무 짜서 한 번 먹고 버렸어요. 이번엔 성공해서 엄마 기쁘게 해드려야 될 텐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엄마의 생일도 아니고 자기 생일날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리겠다니요? 그것도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해 옮긴 것을 보면 겉보기와는 달리 참 생각이 깊은 아이인 것이 분명합니다. 메일을 읽다가 한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짝사랑의 굴욕(?)을 잘 참아내고 아이를 설득하여 메일을 보내달라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기분 아실까요? 생일이 다가오면 뭔가 모르게 우울해진다는 거 말이에요. 전 처음에 그 말이 이해가 안 갔어요. 애들은 우울해진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전 그냥 마냥 좋았는데 조금씩 철이 들고나니까 생일이 다가올수록 나이는 먹는데 제 꿈의 방향은 모르겠고 점점 졸업이 다가오는 고학년이 되려하니깐 뭔가 모르게 기분이 우울해지더라구요. 생일이 안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구요!

생일이 다가오면 우울해지다니요? 그 어린 나이에 말입니다. 놀랍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심리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제 자신의 무심함(혹은 무능함)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인정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아이들을 제 중심에서 바라보며 사랑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에는 기특하게도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지는 글귀도 눈에 띄었습니다.  

전 관심 있는 쪽이 너무 많은데 끈기가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항상 시작은 잘해도 끝맺음을 못한다고 엄마한테 많이 혼나요. 선생님이랑 학기 초에 면담 했을 때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 보셨을 때 많이 당황도 했고 면담 후에 뭔가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내 꿈은 뭘까? 어렸을 땐 그냥 막 다하고 싶었는데 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니깐 정말 뭘 꿈이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궁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가 보내온 편지의 서너 배는 족히 될 만한 분량의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다시 읽어보아도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것이 고마웠던 모양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갈무리 한 걸 보면. 

제 꿈에 대해서 선생님이 자세히 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씀 덕분에 조금은 머릿속에 고민들이 없어졌어요.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제 꿈을 찾아가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서 제가 원하는 길 찾아서 행복하고 싶어요! 항상 감사하고 죄송해요. 우리가 생각해도 청개구리 같은 반인데 그런 저희를 항상 보듬고 가시는 선생님 멋져요! 선생님 사랑해요.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아이들의 진실의 샘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즐거움은 각별합니다. 하지만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마냥 즐거워하고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강요된 사랑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저도 그 고민을 안고 제 꿈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아이의 생일 날 새벽같이 일어나 쓴 시입니다.   

너의 꿈이 잘 영글어가기를!   

가을이라는 말을
난 좋아하지
가을, 가실, 가슬
갈… 갈바람
이런 우리 모국어를.


태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온
맑은 고요함 같은
아, 가을이라는 말
가을에 태어난 사람을
난 좋아하지.


"내일은 조금만 놀고 집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미역국 끓여 드려야겠어요."


너에게 온 두 번째 편지를 읽고
눈물을 찔끔 흘린 뻔 했단다.


어릴 땐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이젠 생일이 돌아오면 우울해진다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끈기가 없는 것 같다고
그래도 조금씩 꿈을 찾아가고 싶다고.


아, 나는 믿고 싶구나!
여름과의 경계를 벗어나
이제 곧 가을이 깊어갈 것을 믿듯이
너의 착한 꿈도 그렇게
잘 영글어 가리라는 것을.


태그:#시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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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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