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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4일)7교시 마지막 영어수업 시간이었다. 다음날 사생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명단을 담임교사에게 알려주다 보니 조금 늦게 교실에 들어갔다.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는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수업으로 들어갔다. 수업 주제는 Slow Movement(느림의 운동)이었다. 수업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주희(가명)가 거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동작을 멈추고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눈치를 채고 거울을 내려놓았는데 내가 눈을 돌리자 다시 거울을 집어 들었다.

"나와!"
"짜증나!"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조금은 늦은 감도 있었다. 벌써 사월인데 학생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희희낙락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좋긴 하면서도 어딘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한 주일에 한 건씩은 일이 생겨 교단일기를 쓰는데 도움이 됐는데 요 며칠 사이에는 너무 심심할 정도로 일이 잘 풀린다 싶던 터였다.

"너 지금 짜증났다고 했어?"
"…"
"너 거울을 보고 있어서 선생님이 일차 지적을 했지?"
"언제요?"

"언제라니? 네가 거울을 보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널 한참 바라보고 있었잖아."
"잘 모르겠는데요."
"잘 모르다니? 네가 방금 전에 한 행동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눈이 아파서 거울을 좀 봤어요. 그게 잘못이에요?"

"거울을 보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지적할 수는 있잖아. 네가 선생님이라면 수업시간에 거울 보는 학생을 가만 두겠어?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생각해요?"

"선생님 지금 많이 놀라고 있어. 너하고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널 한 번이라도 무시한 적 있었어? 그동안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 어떻게 선생님한테 이럴 수 있어?"
"제가 어쨌는데요?"

조목조목 대드는 아이, 눈 앞이 캄캄해졌다

여기까지 대화를 하다가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가 어쨌는데요?' 그 당돌한 반문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 이 대목에서 아이가 피식 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전의를 상실한 채 이렇게 비굴하게 말을 내뱉었다.

"난 너하고 대화를 하고 싶은 거야."
"대화는 무슨?"

확인 사살이라고나 할까? 나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떤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곧 수습되리라는. 한 아이의 행동이 그 아이의 본성에서 나오기보다는 어떤 상황 속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는.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주희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너 지금 나 비웃고 있는 거야?"
"아닌데요."
"그런 왜 웃는 거야?"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잠깐 멈추는 것.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주희를 자리에 들여 보내고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칠판에 단어 카드를 배열하고 퀴즈를 내 준 뒤에 주희를 밖으로 불러냈다. 아이가 나오자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난 널 잘 몰라. 그래서 솔직히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너는 영어실력이 좀 있고, 수업태도가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지적해주면 잘 하려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습관이 잘 잡히기만 하면 대학에 가서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학구열이 있는 아이로 널 생각하고 있었어. 오늘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네 얘기를 좀 듣고 싶어.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거니?"
"…"

"혹시 거울 좀 봤다고 너무 심하게 널 나무라서 그랬던 거야? 네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쳐다봐서? 아니면 너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거야?"
"…"

"그냥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할까? 우리 풀어야 하잖아. 이대로 널 내일 볼 수는 없잖아. 그럴까?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할까?"
"…"

주희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뭔가 말을 하려고는 하였다. 말을 만들지 못해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그것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나는 솔직히 무엇을 안다고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이런 생각만은 분명했다. 내가 아이에게 비웃음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다는 것. 그럼으로 지금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섣불리 나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뒤집어쓸 필요도 없다는 것. 나는 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 남은 수업을 계속하다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주제가 느림의 운동인데 왜 느림의 운동을 하려는 거지요? 빠른 것이 편하고 좋은데 왜 느림의 도시, 느림의 음식, 느림의 책 이런 말을 하는 거지요? 왜 때로는 늦어야 좋은 거지요?"

그 애는 진짜 비웃었던 걸까?

그때 누군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 눈의 주인공은 바로 주희였다. 그 아이는 느림의 운동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만들기가 어려운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씩 웃는 것이었다. 그 웃음은 조금 전에 나에게 보여준 웃음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때서야 아이가 나를 비웃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느림의 운동의 취지를 설명해준 뒤에 수업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조금 전에 주희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는데, 오늘 배운 트러블이란 단어가 바로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에요. 솔직히 선생님 화가 많이 났지만 오늘 수업 주제처럼 'slow up, speed down(느긋하고 천천히)' 하기로 했어요. 빨리 하다보면 진실이 훼손될 수 있다고 했지요? 반대로 천천히 하다보면 그 진실이 되살아날 수 있어요.

오늘 일은 선생님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수업을 급하게 하다보니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주희 잘못도 커요. 언젠가는 선생님에게 사과를 해야할 거예요. 마음 느긋하게 먹고 기다릴게요. 선생님 성격이 유순하지만은 않아요. 오히려 급한 면도 있어요. 저도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도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주희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잘 이겨낸 것 같아요. 지금 주희 표정 보니까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업 끝."

다음날, 수업종이 울리고 교실에 들어서자 주희가 눈에 띄었다. '아, 이 반이구나!'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잠시 후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며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상념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나는 출석을 부른 뒤에도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느린 수업을 하고 있었다. 주희와도 몇 번 눈이 마주쳤다. 한 번인가는 앞에 나가 퀴즈를 푼 아이의 오답을 지적하며 정답을 말하고는 점수를 달라고 졸라댔다. 또 한 번인가는 독해 문제를 가장 먼저 풀었다고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다가가서 답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눈을 예쁘게 굴리며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주희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이의 기억 속에 아예 전날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랬던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더욱 당차고 해맑아 보이기도 했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오자 기분 좋은 산책을 하고 난 뒤 같았다.       


태그:#순천효산고등학교, #행복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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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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