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태권도협회 회장 선거가 있던 날. 아수라장 속에서 인사를 했지만, 그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붉게 달아 오른 얼굴, 망연자실한 모습. 또다시 구정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오늘은 그냥 쉬고 싶네요."

경희대학교 태권도학과 전익기(45) 교수. 그는 '교수님'하면 떠오르는 외모는 아니다. '강성'에 가까운 이미지, 적어도 이제까지는 행동도 그랬다. 그는 '파행'의 현장마다 학생들과 함께 나타났고, 일부에서는 전 교수를 '선량한 학생들을 충동질하는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있다.

누군가 학교에 투서도 넣었다. 그래서 총장님으로부터 '조심하라'는 충고도 받았다. 그런데도, 거침이 없다. '지지하는 후보를 밝혀달라'고 요구하면, '위험 인물'로 찍힌 마당에도 고민하는 기색이 없다. "뭐,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죠. 그래도 구천서 후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태권도의 상품 가치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5일, 전 교수의 뜻대로 결과는 나왔다. 전화를 걸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학교로 돌아 가야죠". 지난달 24일, 태권도협회 회장 선거가 무산됐던 대의원 총회. 함께 참석한 제자로부터 "태권도를 배운 것이 창피하다. 너무 부끄럽다"는 고백을 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태권도를 배운 것'은 전 교수의 제자만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들도 태권도를 배웠다. 그래서 이번 파행은 더욱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숨을 나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왜 우리 태권도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태권도에 미래는 있는걸까. 어떤 '희망'을 듣고 싶었다.

- 대의원 총회 현장에서, 태권도인으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60년대초 협회가 생긴 후, 처음으로 경선을 하게 됐다. 태권도인들에게는 경사스러운 날 아닌가. 그런데... '예쁘게 차려 입고 나갔는데, 자동차가 구정물을 튀겨 확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이다."

-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말인가.
"양심적인 운전자라면, 물이 고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겠는가. 태권도인으로서 너무 파렴치한 행위다."

- 이 후보측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 않은가. 선관위조차 구성돼 있지 않았던 걸로 안다.
"물론, 협회도 잘못했다. 공정 선거와 관련, 책잡힐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은 잔치를 망친 사람들에게 있다. 맥을 바로 짚는다면, 김운용 회장 퇴진 이후 소외된 지분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 이번 파행으로 국민들의 실망도 크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나.
"사실 태권도는 여기 저기 온통 병이 나 있는 상태였다. 단지, 그동안 옷으로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젠 곪아 터져 고름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다. 썩히느니 끄집어내서 치료하는 게 낫다."

- 새롭게 구성될 집행부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워낙에 태권도계는 선후배나 스승관계로 묶여 있다. 이와 같은 홍역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더욱 골이 깊어지고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다. 일단,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주장을 반대한다고 적은 아니지 않은가. 상대 후보측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은 반드시 써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협회가 태권도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태권도 발전을 위해 가장 먼저 개선돼야 할 점은 무엇인가.
"태권도인중에 비경기인(일반 수련생)이 99%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협회의 제반 업무는 온통 경기에 치우쳐 있는 것이 문제다.

'태권도 한마당'은 일선 체육관들을 위한 유일한 잔치다. 그런데도, 협회에서는 걸핏하면 돈이 없다고 그런다. 말이 안되는 게, 24일 대의원총회 결산보고에서 삼십 몇 억의 잔고가 남았다고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태권도만큼 자립할 수 있는 종목이 어디 있느냐. 협회는 무사 안일주의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비경기인들을 위한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럼 더 많은 성인들이 도장을 찾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렇다보니 경기인은 '겨루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시합에서 이기는 방법만을 배운다. 정부의 잘못과도 맞물려 있는 부분이지만, 운동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디 공부를 하겠는가. 학과 내에 선수 출신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학업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 입시 부작용과 똑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 태권도의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가.
"서양에서 태권도는 성공했다. 왜 그들이 비싼 돈을 내면서, 자녀들을 도장에 보내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미국에서 태권도가 자기 방어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총 앞에서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웃음). 자신들이 가르칠 수 없는 부분들을 대신해주니까 보내는거다. 국내에서도 일선 도장들이 절대 다수인 비경기인들을 소화하고 있다. 외국과 똑같은 상황이다.

수련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태권도다. 태권도의 상품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스럽게 인성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 효과가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부각돼있지 않다. 무엇보다 정부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김운용 회장도 일조했다. 그동안 정치 쪽에 더 신경을 쓰지 않았는가."

- 협회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세계 태권도 연맹 총재로서 김운용 씨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한데.
"어쨌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선장은 떠났다. 오히려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을 해보겠다는 강한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 본다. 어차피 갈 때까지 간 것 아닌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일만 남은 셈인데, 올바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밑에 많다. 현재 10개 대학에 태권도 학과가 있다. 잘못된 걸 짚어내는 지성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무서운거다. 희망적이다."

- 특별히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라도 있는가.
"대학 다닐 동안 무엇이든지 멋들어지게 미쳐보라고 한다. 당구를 치러 가든지, 애인을 만나러 가든지. 강의를 듣는 것보다 그게 더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단지 성적에는 연연하지 말라고 얘기한다(웃음)."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 태권도는 세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무도, 스포츠 그리고 생활 체육이다. 우리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서로 양보를 하고 화합을 이룬다면, 태권도의 앞날은 밝다."
2002-02-08 17: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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