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우희용입니다"
우희용 코치가 가방에서 큼직한 카드 한 장을 꺼내 준다.

- 명함이 특이하네요?
"아, 예. 사인 카드로 쓰거든요."

명함 안에서도 '우희용'은 여전히 공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지금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 긴 파마 머리가 낯설다. 그리고 유니폼에 뭐라고 써 있다. ...OREA...002, 'KOREA, 2002 ?'. '우희용'의 왼손 위에 인쇄된 몇 개의 글자로 의문은 사라졌다. '2002 WORLD CUP Korea Japan'.

"사인하면서 나눠주면, 곧바로 우리나라 홍보되는 거잖아요. 스폰서 십이 관련 없는 공연 때마다 '2002 월드컵 티셔츠' 입고, 현수막과 태극기도 걸고. 외국 사람들을 상대로 직접 홍보하는 거니까, 월드컵 유치에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마 월드컵을 유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작했으니까...1994년부터일 거에요."

'월드컵유치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1994년 1월 18일. 그때부터 우리나라는 월드컵 유치를 놓고 일본과 피말리는 싸움에 들어가게 된다. 양국간 경쟁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는 1996년 초.

한국과 일본 사이의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개최권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에다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싸움까지 겹쳐 그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는 것이다.(한겨레 1996. 2. 24일자)

일본의 독도 망언으로 월드컵 유치 경쟁이 민족적 자존심 대결로까지 확산됐던 때. 우 코치가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시간'은 시작된다.

"1996년 LA마라톤대회에서 42.195km를 축구공 묘기를 하면서 도전을 했었습니다. 25km지점에서 묘기를 보이면서 가던 중에 발바닥에서부터 마비 상태가 오더라구요. 그때 마비를 풀면서 가던 것이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MBC에서 방영된 모 프로그램中 우희용 씨의 회상)

위에 덧붙이면, 우 코치는 태극마크와 축구공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머리에 공을 올려놓고 바늘을 꺼내 들었다. 발바닥을 찔러 피를 내가며 성공한 완주 기록은 9시간 17분. 그는 일주일동안 걸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우리나라에서 개최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공동 유치는 상상도 못했죠."

공동 개최가 확정된 후에도, 우 코치의 '홍보'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공연 때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립니다'는 멘트를 빼먹지 않았고, 사인 카드(명함)를 나눠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예인(藝人)'으로서의 생활도 성공적이었다. 우 코치의 축구 예술은 라스베가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세계적인 휴양지 하와이.

"와이키키 거리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곳만큼 (월드컵을) 홍보하기 좋은 장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니까요. 1998년 5월부터 일주일에 3-4회, 하루에 2시간씩 무료 공연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도로까지 들어차 구경할 정도로 많았어요. 나중에는 시에서 경찰을 보내 질서 유지를 시킬 정도였습니다."

- 그렇게 월드컵 홍보에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생을 축구로 살아왔습니다.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 월드컵이 우리 축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무엇보다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축구 발전에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인터뷰중 우 코치의 입에서는 '엔터테이너(Entertainer)'라는 표현이 자주 흘러나왔다. 확실히 그는 '예인(藝人)'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엔터테인먼트의 본고장 미국, 그것도 라스베가스와 하와이에서 거푸 성공을 거두기는 힘든 일이다.

"세계적인 엔터테이너(Entertainer)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1995년 잠시 귀국했을 때 만들었다는 명함은, '세계적인 엔터테이너'를 제대로 부각시켜 주지 못한다. 명함 뒷면에 조그맣게 새겨진 'Pele`s 50th Birthday Celebration'을 '2002 WORLD CUP Korea Japan'자리로 옮겨 주고, 'Original Kimchee'대신 라스베가스에서 공연했던 시저스 펠리스 호텔 이름이 들어가면 어떨까.

'우희용'의 명함이 특별한 이유다.

그렇다면, 축구인 '우희용'이 대구 월드컵 경기장 공연을 마치고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들은 무엇일까. 그는 한국 축구를 어떻게 바라 보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우희용 코치의 세 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2002-04-30 14:32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우희용 코치의 세 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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