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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강화> 표지
ⓒ 창작과 비평사
고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여러 가지 이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정의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고대의 전적이나 경전 또는 오래된 법식이나 전례'이며, 또 다른 하나는 '책상 위의 가치 있는 책'이다. 이 중에서도 필자는 후자의 정의, '책상 위의 가치 있는 책'을 좋아하여 이 말을 곧잘 인용하기도 한다.

필자의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당시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영어문법책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정치근 선생의 <기본영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빨간 표지였고, 딱딱한 영어문법을 쉽고도 재미있게 설명하였기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었다. 당시 이 책은 속칭 '빨간 책'이라고 불렸다. 빨간 책! 유신 말기의 엄혹했던 시절에 빨간 책이라니!

얼마 전에 서점에 들러 영어서적 관련 코너를 가니 이 책이 아직도 출판되어 버젓이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된 이유야 당연했다. 여전히 잘 팔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팔린다는 것은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빨간 책'은 '책상 위의 가치 있는 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어문법책의 고전이다.

그런데 필자가 대학에 들어가니 중, 고등학교 시절의 참고서 고전을 능가하는 '고전'들이 즐비했다. 문학개론이나 시론, 경제학 원론 같은 책들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학생들과 교수들의 주요 교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국문학 관련 도서에서 그런 고전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남쪽에서 잊혀 진 고전들도 참 많았다. 1946년에 간행된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도 잊혀 진 고전 중의 하나였는데, 고전이라고 취급받을 정도로 <문장강화>는 '책상 위의 가치 있는 책'에 속했다.

필자는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범우사 간행 문고판으로 처음 읽어보았다. 그런데 <문장강화>는 읽을 때마다 그 맛이 달랐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낯선 용어 때문에 어색한 느낌이었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한문 번역 투에 질려 지겨웠으나, 세 번째 읽어보니 그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가기 시작하면서 왜 이 책이 문장론의 <고전>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태준 선생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1904년에 태어나 1925년에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는 박태원, 이효석,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면서 동인활동을 하였고, 해방 직후에는 임화 등과 더불어 청년작가대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카프계열의 작가들과 함께 월북을 하였으며 6.25동란을 전후하여 많은 사실주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1956년 경, 문학예술출판부 열성자대회에서 비판을 받고 숙청되고 말았으며, 그 후 그의 생사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다. 한마디로 시대의 불우함을 온 몸으로 받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반도의 남쪽 땅에서 문장론의 고전으로 추앙받는 책 한권을 남겼으니 그게 바로 <문장강화>라는 책이다.

원래 <문장강화>는 이태준이 주관하던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되다가 9회로 그치고 이듬해 문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복 직후인 1946년에 그 증정판이 박문출판사에서 간행되었는데, 이태준이 월북하는 바람에 40여 년간 남한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문장강화>는 이런 어두운 시절을 거쳐 창작과 비평사에서 1988년에 신판을 간행하면서 비로소 남한의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다시 임형택 교수가 해제한 신국판이 출판되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주제를 내걸고 거기에 관해 장절을 나누어 곡진하고 진지하게 강론한 내용이 바로 <문장강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장강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풍부한 예문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전문과 근대문, 편지에서 기사문, 기행문까지 넘나드는 풍부한 해설, 운문과 산문에 대한 명쾌한 해설, 묘사와 설명, 각종 문체 등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인 설명을 읽노라면 저도 모르게 문장론의 세계로 흠뻑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역시 60년 전의 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특히 예문으로 나온 1930년대의 문장들이 오늘날의 문장과는 그 어감이나 의미가 아주 달라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은 역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 것은 임형택 교수가 해제라는 장치를 통해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임 교수는 60여년의 시공을 넘어오느라 다소 지친 <문장강화>를 새로운 언어와 상황에 맞게 적절히 수정하였으며 그 수정작업이 아주 매끄럽게 이루어졌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또한 페이지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로 달아놓은 주석들은 국한문혼용체에 익숙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그나마 청량제 구실을 하는 소중한 장치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은 '고전'이라고 할 수가 없다. 고전은 아무리 먼 세월이 흘러도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시대와 조건에 맞게 재창조되고 변형되어 보다 나은 의미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시대를 넘어, 역사를 넘어, 한민족의 말과 글이 살아 있는 한 영원한 문장론의 고전으로, '책상 위의 가치 있는 책'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창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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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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