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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한국의 인문학은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외국이론을 수입·모방·재생산하는 하청이 주된 작업이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외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은 연구자가 신속한 정보수집과 해석능력을 바탕으로 학문적(!) 경쟁력을 보장받았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런 자해·공갈행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인문학의 대외종속은 여전하다.

우리의 외국 선호와 사대 및 자기비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조선이 제나라 글을 가장 늦게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일본이 8세기 무렵 히라가나를 만들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던가. 15세기 중엽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 집현전 학사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찬양·고무했던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는 무엇인가.

이 점에서 <고대문명교류사>는 뜻깊은 저작이다. 간첩 '깐수'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정수일은 남북분단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짧지 않은 옥살이를 경험한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런 필자가 한국 인문학의 자생적인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집필한 책이 <고대문명교류사>다.

"이제 우리도 학문,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남의 뒤따름만이 아니라 무언가 앞섬이 있어야 하겠다는 시대적 사명을 깊이 간직하면서." (9쪽) 

한국 인문학의 자생을 위하여, <고대문명교류사>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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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교류사>는 매우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다. 인류가 태동한 시원부터 기독교의 동방전래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대와 구대륙이라 불리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대륙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을 망라하고 있음이 그 까닭이다. 필자는 우선 문명과 문화의 개념을 명확히 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문화는 문명을 구성하는 개별적 요소이며 그 양상이다. 문명과 문화의 관계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총체와 개체, 복합성과 단일성, 내재와 외형, 제품과 재료의 포괄적 관계다. 비유컨대 문명이 총체로서의 피륙이라면 문화는 개체로서의 재료인 줄, 씨줄과 날줄에 해당한다."(23쪽) 

필자가 누누이 지적하는 것은 서구중심주의에 기초한 선진서양 혹은 후진동양 따위의 이분법적 발상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촉발된 서양의 기술문명 발전 속도가 동양의 그것을 앞지른 시기가 겨우 200년 남짓이라고 판단하는 필자는 오천년 인류 문명사에 비출 때 그것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문명교류사>를 관류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문명의 교류다.

"인류는 출현할 때부터 비록 원시적이지만 문명을 창조하고 향유하였으며, 접촉과 교류를 통해 그 영역을 부단히 확대하고 다양화해왔다." (43쪽)

이 점에 의지하면서 필자는 상이한 문명의 발전양상과 진화과정 및 상호교류에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문명의 발원과 진화 및 사멸의 도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문명의 지속적인 만남과 교류의 관점으로 문명사를 통관하는 자세가 저작에는 수미일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대문명교류사>는 문명사 연구에서 변방에 자리하였던 이민족의 역사적인 의미를 재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스키타이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기마민족의 역사적 발자취와 문명을 유라시아 전체의 역사적 흥망과 결부하여 장쾌하게 논하고 있다.

"중심문화와 주변문화라는 비대칭적인 양분논리 속에서 후자에 속한 유목기마민족의 역사와 문명이 소외당해온 것은 분명 문명사 연구의 오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대문명을 응징하기 위해 파견된 신의 채찍으로써 역사의 그물을 찢고 인류문명의 수레바퀴를 떠밀어온 위대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219쪽)

제6장 로마와 한의 교류에서 정수일은 헬레니즘 문화의 역사적인 의미를 보다 확장하여 규정한다.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유럽을 지탱하는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헬레니즘을 중국문화와 접목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안목과 관점을 한결 고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고전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로 이어져온 고대 오리엔트 문화의 첫 만남이며, 또한 인도나 중국의 고대문화와 서방문화의 접촉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동서 문명교류사에 중요한 장을 열었다. 이때까지 아시아와 유럽은 페르시아의 매개로 간접관계만을 맺어왔으나 이제는 직접관계로 변하였다."(362쪽)

필자는 3대간선과 5대지선 및 무한한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실크로드와 한반도와 실크로드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며 한국에서 '실크로드 학'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반도 역사 전개과정, 특히 서역과의 교류사를 추적해보면 한반도 역시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종 실크로드라는 대교통망의 고리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응분의 역할과 기여를 하였음을 긍정하게 된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대한(對韓) 연계상을 구명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616-617쪽)

세계사 속 우리 역사에 대한 유익하고 호쾌한 시각

그의 역사적이고 당면적인 시선은 오늘날 남북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로 새로 열리는 우리들의 제한된 시선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필자의 관점은 우리에게 적잖게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과 그 이후 대립과 항쟁으로 얼룩진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 이래 우리는 대륙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남북한 정권수립과 6·25 남북전쟁 이후 분단이 장기간 고착화함으로써 분열과 대립양상이 현저하다.

더욱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군사 통치와 야만적인 정권들은 지역감정 조장으로 남한의 동서분단을 획책함으로써 상황을 훨씬 악화시켰다. 그런데 정수일은 우리 역사와 세계사의 연관성에 대한 드넓은 시야확보와 진정한 세계화를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한 유익하고도 호쾌한 시각을 제기한다.

<고대문명교류사>는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일부일 따름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문명교류와 결부된 저작을 준비하고 있으며 (677쪽의 후기 참조), 따라서 머지않아 중세와 근현대의 문명교류와 결부된 그의 노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방대한 저작에 필자는 참고문헌을 첨부하고 있지 않으며, 더러 각주에서 모호한 문제점을 남김으로써 독자들의 불만을 야기한다. '고대문명교류사 연표'나 '찾아보기' 같은 자상한 배려가 독자를 얼마나 흐뭇하게 하는지 이해한다면 이 책에도 조만간 이런 문제가 시정되었으면 하고, 앞으로 있을 그의 저작에도 넉넉한 부록이 준비되기를 바란다.

<고대문명교류사>는 역사학자의 단순한 노작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학 연구뿐만 아니라, 문헌학, 고고학, 문화, 예술, 종교 등을 망라하는 위대한 건축이다. 오천년 이상에 걸치는 동서양 문화와 문명을 '교류사'의 관점으로 통관하려는 자생능력 있는 인문학 연구의 소산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사계절, 2001.


요즘 청년 학생들이 책읽기에 소홀하고, 눈앞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날이 심화함으로써 나라의 장래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문명사나 교류사 연구는 대여섯 가지의 외국어를 습득해야 천착 가능한 분야라는 점에서 어려움을 더한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려워만 보이는 학문의 세계 한가운데로 청년 학도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사계절(2001)


태그:#교류사, #인문학, #문명사, #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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