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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주인의 사적 휴식처. 노송의 그늘 아래서 시문을 읊고 상사화 ,원추리,붓꽃을 심어 자연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내가 찾고있던 정자의 모델이다.
▲ 초가정자 선교장 주인의 사적 휴식처. 노송의 그늘 아래서 시문을 읊고 상사화 ,원추리,붓꽃을 심어 자연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내가 찾고있던 정자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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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 문화재4] 해운정

1일 점심 식사 후 처음 도착한 곳이 보물 183호로 지정된 해운정이다. 1530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심언광 선생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명나라 사신인 공용경(龔用卿),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조선시대 명망이 높은 사대부들이 해운정의 낭만을 읊은 시가 37개의 현판에 남아있어 조선시대 상류사회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심언광 선생의 200년 후대의 후손 생가, 해운정을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 심상진 가옥 심언광 선생의 200년 후대의 후손 생가, 해운정을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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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심언광 선생이 지은 정자. 당대 저명한 문인들이 쓴 시를 현판에 적어보관하여 명판이 높다.
▲ 해운정 1530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심언광 선생이 지은 정자. 당대 저명한 문인들이 쓴 시를 현판에 적어보관하여 명판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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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정을 접한 심상진 가옥(강원도 유형문화재 79호)은 심언광 선생 200년 후대의 후손이 살림집으로 지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들 주택이다. 심상진은 해운정을 별당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정자 앞쪽이 모두 논으로 변해있지만 이 정자를 건축할 당시만 해도 경포호 수면이 정자 앞까지 찰랑거린 모양이다.

"해운정은 강릉에서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라고 설명하신 교장 선생님께서 한옥의 출입문과 창문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물으신다. 아무도 명확한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문턱의 높고 낮음과 문과 문지방 사이에 장식이 있고 없음의 차이"라는 정답을 알려주시면서 장식은 문틀과 문지방 사이에 있어야 하지만 예외가 해운정이라고 하신다. 곰곰히 살피니 문 아래에 있어야 할 장식이 문 위로 올라가 있다. 한옥의 개성이란다.

[강릉지역 문화재5] 선교장

선교장은 경포호가 현재와 같지 않고 그 둘레가 12㎞였을 때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고 하여 '배다리[船橋]'라는 택호를 가지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이 족제비들의 안내로 터를 얻고 이곳으로 이사오기 위해 1748년에 안채를 건립한 것을 시초로 그의 후손들이 정착하여 살면서 열화당, 행랑채, 동별당, 서별당, 활래정 등의 부속 건물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한옥마을과 같은 큰 규모를 이뤘다.

맑은 물은 근원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있기때문이라는 의미를 지닌 활래정. 선교장 입구의 연방죽 가에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건축한 정자. 현존하는 정자 중 최고로 친다.
▲ 활래정 맑은 물은 근원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있기때문이라는 의미를 지닌 활래정. 선교장 입구의 연방죽 가에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건축한 정자. 현존하는 정자 중 최고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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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의 사랑채. 건물의 형태가 특이하고 높은 기단 위에 건축하여 위엄이 있는 건물이다.
▲ 열화당 선교장의 사랑채. 건물의 형태가 특이하고 높은 기단 위에 건축하여 위엄이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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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을 들어서면 연방죽 안 4개의 돌기둥 위에 건립한 정자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지닌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의 주 출입구인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서별당이 가로막는다. 우측 담 넘어로 보이는 안채 곁을 지나면 일가 친척들의 단합을 강조하는 의미의 당호를 가진 열화당을 만난다.

열화당은 1815년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격동하는 정치 변혁기의 풍파와 같이 한 건물이다. 앞에 덧댄 러시아 풍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곳이었다는 소문이다.

건물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있는 팔작지붕 양식의 사랑채 건축물이다. 7개의 석조 계단 위에 자리하여 위엄을 나타낸다. 외부 공간이 창호로 둘러싸여 한국 전통 건축 외부 창호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동별당은 경농(1877~1938)이 건립하였으며 안채와 연결된 별당이다. 화강석 장대석을 4겹으로 쌓은 기단 위에 각형의 초석을 사용했으며 지붕은 겹처마와 팔작지붕 형식이다. 안채에 가까운 별당으로서 방문객들과 분리하여 가족들의 단촐한 모임을 위해 건축되었다.

열화당을 지나 뒤쪽으로 오르니 초가 3칸 규모의 아담한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선교장 주인의 극히 사적 별당인 모양이다. 내가 그동안 꿈 꿔온 서재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정도 규모의 누각을 손수 짓기 위해 지금 겪는 이 과정을 기꺼이 받아드리고 있다.

퇴직 후 여유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최소한의 경비로 손수 지을 계획이다. 지붕은 너와를 깔 것이고 외부는 목조주택 창호를 사용할 생각이나 어울릴지 모르겠다. 3차원 프로그램으로 설계하고 충분히 검토할 것이다.

호화로운 장식은 없으나 활달한 느낌이다. 결구 방식도 민가에 널리 사용하는 납도리 방식을 사용한 민도리 집이다.
▲ 선교장 건물의 형태 호화로운 장식은 없으나 활달한 느낌이다. 결구 방식도 민가에 널리 사용하는 납도리 방식을 사용한 민도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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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의 신혼시절을 보내는 외별당의 장독대이다. 큰 살림의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다.
▲ 선교장 장독대 맏아들의 신혼시절을 보내는 외별당의 장독대이다. 큰 살림의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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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선교장은 호화로운 장식이 없다. 결구 방식도 납도리이며 가구도 민도리 형식이다. 그러면서도 활달한 느낌이 풍긴다.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장독대가 정겹다. 이런 연유로 20세기 한국 최고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강릉지역 문화재6] 오죽헌

이이 이율곡 선생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는 업적과 사상을 아는 것보다 오천원권 지폐와 오만원 권 지폐 앞면에 새겨진 얼굴 때문에 더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오죽헌은 이조 참판을 지낸 최치운(1390~1440)이 건축하여 사임당 신씨 아버지인 이사온에게 상속된 건물이다.

이이 선생은 29살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를 역임했다.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쳐 정치개혁을 시도했고 북방과 왜적침입을 대비한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는 등 시국을 내다보는 탁월한 식견을 가지신 분이다. 그는 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대관과 국왕께 조언하는 간관의 임무인 청요직을 수행하면서 동인과 서인의 당쟁 중재에 노력하신 조선 중기의 전무후무한 학자요 정치가였다.

오죽헌은 사임당 신씨께서 친정에 머무신 동안 율곡선생이 태어난 가옥이다. 율곡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후대에 지은 문성사가 오죽헌 위쪽에 자리한 모습이 보는 이에 따라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율곡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내린시호이다. 도덕과 학문을 널리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 문성사 율곡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내린시호이다. 도덕과 학문을 널리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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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문성사의 보 방향과 일치시키기 위해 오죽헌 주변 건물들을 본래 위치에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시는 교장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후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오죽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일은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일인 것 같다.

오죽헌은 도리 방향으로 3칸, 보 방향으로 2칸 규모인 건물이다. 건물의 좌측과 우측 후면에 마루를 두고 우측 전면에 온돌방을 두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모두 사각형이다. 공포형식은 초익공으로 결구시키고 그 위에 다시 주두와 2익공을 놓아 보를 받았다.

6시가 넘도록 오죽헌을 분석하고 뜯어보는 우리들은 관리직원의 성화에 쫓기다시피 경내를 빠져나왔다. 정신이 없다 보니 정작 찍어야 할 오죽헌 전경 사진도 못 찍었다. 귀교시간이 너무 늦었다. 학교에 돌아와 때 늦은 저녁을 먹고 귀향 길에 오르니 9시가 넘었다. 참으로 하루를 한 달 같이 보람되게 사용한 날이다.


태그:#지용한옥학교, #강릉문화재, #해운정, #선교장,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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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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