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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쟁적 교육제도 안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이상적인 꿈을 꾸며 교육학을 공부했다. 졸업을 앞두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던 중, 대학본부 행정부서의 계약직으로 취직할 기회가 생겼다. 좋은 분들 아래서 1년 간 즐겁게 일했고, 계약이 끝나갈 즈음 부서장의 추천을 받아 교내 프로젝트팀에 지원하게 됐다. 면접을 본 부장 교수는 긍정적인 답을 줬다.

"대학본부 출신이니 일은 잘할 테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 우리가 하는 일은 교육 그 자체지. 회의 하고 곧 연락 줄게."

정말 곧 연락이 왔고 인수인계 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잘못된 만남... B팀장과 나

이 노래가 멀리서 들려오지 않았을까. B팀장과의 첫 조우 당시, 인연의 단추는 어긋났다.
 이 노래가 멀리서 들려오지 않았을까. B팀장과의 첫 조우 당시, 인연의 단추는 어긋났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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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대학이 협약을 맺고 교수들이 기업에 기술지도를 하거나 방학 때 학생 인턴을 보내는 걸 지원하는 등의 업무를 보는 산학협력 프로젝트팀이었다. 사업의 모든 예산은 국비로 충당됐다. 부서장 교수에 부장교수들이 여럿 있었고, 그 아래로 과장과 팀장이 있었다. 과장과 팀장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은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계약직이었다.

한 해 사업을 마무리하며 제출해야 할 보고서 작성이 한창인 3월 초, 첫 출근을 했다. 모두가 분주한 중에 뭐라도 도움이 돼보려 했지만,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건 오탈자 확인이 고작이었다.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저녁 7시, 과장에게 더 도울 것이 없겠냐 물으니 딱히 없다고 그냥 퇴근하란다. 여기서 티나게 인사하면 민폐라는 생각에 조용히 나가려고 한 게 잘못이었을까. 전임자가 "괄괄하다"고 귀띔해준 B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샘 지금 가는 거야? 가려면 인사를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다 일하고 있는데!"

이런, 이거 첫날부터 꼬였다. 둘째날부터는 눈치껏 함께 야근했고, 보고서 제출 전날엔 모든 직원이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보고서 결과 발표 전까지 한 달가량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고생한 덕분인지 평가는 굉장히 좋게 나왔고, 사업도 계속 이어지게 됐다.

'나아질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 다 부질 없네

B팀장 아래로는 나 이전에 두 명의 퇴사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별은 그닥 좋지 않았다.
 B팀장 아래로는 나 이전에 두 명의 퇴사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별은 그닥 좋지 않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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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끼운 첫 단추처럼 어긋난 만남으로 인연을 시작한 B팀장은 감정표현이 화끈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래 사람에게만 말이다. 내가 들어오기 전 퇴사한 직원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팀장을 에둘러 비판한 글을 보고 내뱉은 한 마디가 기억난다.

"내보내길 잘했지."

두 달 뒤 다른 직원 한 명도 B팀장의 등쌀에 못 이겨 이번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퇴사했다. 세 번째는…. 내 차례였나보다. 팀장의 성향과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내 업무 능력은 시너지를 냈고 '갈굼 보존의 법칙'은 나를 향했다. 예산이 들어오고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고 갈구는 B팀장 아래에서 험난한 직장생활을 이어나갔다. '일에 익숙해지면 점점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하고 기약없는 기대를 품고.

팀 사업비는 30억~40억 원가량. 예산을 남기면 사업 종료 후 환수되고 다음해 예산이 깎인다. 따라서 예산을 절약하는 직원은 '일 못 하는 직원'이 된다. 나랏돈은 주인 없는 돈이라는 말을 체감했다. 대형 복합기가 두 대나 있지만 인쇄는 인쇄소에 맡기는 게 불문율이었다.

토요일에 출근해서 예산 아낀답시고 설명회 자료 몇천 장을 우리 프린터로 출력했다가 B팀장에게 사소한 꼬투리가 잡힌 뒤 자료 수정 지시를 받았다. 출력물은 모두 폐기한 뒤 인쇄소에 새로 출력을 맡기기도 했다. 연수회 숙소는 5성급 호텔로 잡았고, 부장교수들은 식사 영수증을 주면서 회의비로 처리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소셜커머스에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 최저가 쇼핑을 하고 소비보다 절약을 뿌듯해하는 내겐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근무환경이었다.

실수를 감추기 위한 필사의 노력... 팀장의 지시로 철야 근무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실수를 감추기 위한 필사의 노력... 팀장의 지시로 철야 근무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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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는 회계감사가 있었다. 내가 참여하지 않았던 전년도 사업에 대한 회계감사였는데, 비리랄 건 없었지만 실수나 잘못을 숨기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전임자가 공금으로 사먹은 두유와 집에 갖고 간 락스 영수증은 학생지원비로 바꿔 넣어야 했다.

학생들이 기록한 인턴 실습기록지가 80개가량 비었는데, B팀장은 나더러 이것을 모두 만들어내라고 했다. 난 못 하겠다면서 버텼고 B팀장은 밤을 새서라도 완성하라고 완강하게 지시했다.

결국 내가 꼬리를 내렸다. B팀장은 두 눈을 부릅뜨고 내가 괘씸했는지 다른 직원들을 동원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회계감사 전날 밤은 새웠지만 완성은 못했다. 이틀에 걸친 회계감사 중 내 파트는 둘째날로 배정돼 밤을 하루 더 새워야 했다. 이틀 밤을 새워가며 만든 '조작 실습록'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들춰보지 않고 넘어갔다. 그전에도 화기애애하진 않았지만, 회계감사를 치르며 B팀장과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관계가 틀어졌다. 퇴사도 종종 생각했지만 날 추천해주신 분께 누가 될까봐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애썼다.

"더러운 꼴 앞에..." 이 글이 낳은 파장

힘들어서 남긴 몇 줄의 글이... 이렇게 큰 폭풍이 돼 돌아올 줄은 몰랐다.
 힘들어서 남긴 몇 줄의 글이... 이렇게 큰 폭풍이 돼 돌아올 줄은 몰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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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끄적거리던 블로그가 있었다. 지인들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누군가 그냥 읽어도 나인 줄도 모르는 블로그.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지만 방문하게 되면 글은 읽을 수 있는 그런 익명의 일기장이었다. 생각과 일상을 기록했는데, 쓴 글의 절반 이상은 직장 이야기였다. 당시 기록한 내용이다.

"한 걸음 떼면 지적 들어오니 뭘 어째 해야할지 모르겠당. 휴휴"
"더러운 꼴 앞에 표정 관리가 안되고 웃음도 안나오고 도무지 숙이질 못하겠다."
"되지도 않을 일을 지시하는 인간이나 딱 잘라 못하겠다고 말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 헛짓거리를 수행하는 인간이나 한심하긴 매한가지. 후자는 당연 나다."
"회계감사 준비인데,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고 있다."
"그런데 이번 부서는 -_-;;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분이 장이다."
"오늘같은 경우도 분명 내 전임자의 실수인데 우리 실수가 아니라고 우겨야 하는 상황."

그런데 뒤늦게 안 것이지만, 소름 끼치게도 누군가 내 컴퓨터를 본 모양인지 그 블로그의 존재를 팀장과 부장교수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속어와 도를 넘은 비난 없이 솔직한 심정만 적었다는 것.

블로그의 존재가 탄로난 뒤 B팀장은 나를 추천한 분께 찾아가서 별의 별 소리를 다한 모양이다. 발령 초반 서류 찾느라 캐비넷을 뒤적인 것과 기념품 예산 출처를 물어본 일은 '사무실의 잠재적 내부고발자'로 의심할 근거가 됐다. 야근 중 교수 간담회에 직원 머릿수 채운다고 동원됐다가 사무실에 복귀한 일은 '밤에 술 마시고 와서 근무하는 직원'으로 보고됐다.

내 업무 도와주겠다며 학생보험서류를 갖고 가서 자기 방에 두고 퇴근해버린 말단 교수에게 "죄송합니다만 연구실(행정직원 한 명과 같은 방을 썼다) 비밀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낮에 가져가신 서류에서 찾아볼 게 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일은 앞뒤가 잘린 채 '밤 늦은 시각 가정이 있는 여자 교수에게 개인 연구실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무뢰한'으로 몰리는 정황이 됐다.

쓸데없이 갈구던 팀장님... 마지막까지 너저분한 이별

B팀장님, 이제는 좀 달라졌나요? 여전히 똑같나요?
 B팀장님, 이제는 좀 달라졌나요? 여전히 똑같나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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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추천해주신 분과 상의한 뒤 더 이상 버티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곧 후임이 뽑혔고 성심성의껏 인수인계했다. 마지막날엔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B팀장과 크게 부딪히며 너저분한 이별을 했다.

과연 만날 일이 없을까. 며칠 뒤, 내 퇴사일이 후임의 입사일보다 이틀 빨라서 내 사직서를 수정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쿨해 보이고 싶어서 "사인 대필해서 처리하세요"라고 답했다. 만만하게 본 걸까? 이틀치 급여도 환수해 가겠단다. 어떤 아재의 말마따나 '가만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구나.' 내 입장에선 손해 볼 필요가 없으니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연락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담당자에겐 팀장이 사과하면 넘어가겠다는 뉘앙스로 에둘러 말했고, 잘 해석했는지 B팀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회사를 나가면 고객이 될 수 있고, 어디서 어떻게든, 외나무다리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게 인간 관계라던가. 팀장한테 사람에게 함부로 한 댓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함께 엮여 고생할 전 동료들이 마음에 걸려 망설이다가 그냥 넘어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번 경험으로 사람에게 감정 내키는 대로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길 바라면서. 만난 상사 중 가장 꼰대스러웠던 그분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직원에게 팀장이라는 권위로 모멸감을 주면서 갑질을 즐기고 있을까.

가끔 SNS에 넋두리를 올렸다가 발각돼 상사에게 불려갔다는 경험담을 접할 때마다 그 팀장이 떠오른다. 부하 직원의 솔직한 넋두리를 발견했다면, 부하 직원이 어떤 부분에 불만을 품고, 무엇을 문제라 생각하는지 꿰뚫어보고 이해하는, 마음 넓은 상사가 될 절호의 기회이지 않을까. 혹 앞으로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 부하 직원의 SNS에 상사의 칭찬이 올라오도록 만들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태그:#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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