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편을 살리려거든 5만 원을 갖고 오시오" "...." 고종엽(1910년생)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편 손남석을 전남 완도군 노화면 이포리 농협창고로 끌고간 지방 좌익들은 돈을 요구했다. '시골에서 5만 원이라니...' 하지만 남편을 살리려면 5만 원이 아니라 50만 원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마을을 이 잡듯이 다닌 그녀는 집안 아저씨에게 간신히 3만 원을 융통할 수 있었다. 

"지가 구한다고 했지만 3만 원밖에 장만을 못했어라. 지발 살려 주시우." "할 수 없지라. 손남석씨를 데릴러 가붑시다." 고종엽은 반가운 마음에 좌익 청년들을 뒤따라 전마선(傳馬船)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사는 완도군 노화면 동천리 천구마을에서 면소재지 분주소(북한군 점령 시절의 지서)까지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배가 남부리를 지날 때였다. "이 × 묶어"라는 고함에 좌익 청년들이 고종엽에게 달려들어 광목천으로 뒷결박했다. "악! 살려 주씨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바다로 사라졌다.

청년들은 그녀 가슴에 커다란 돌을 매달았다. 그 돌이 무슨 용도인지 알아챈 고종엽이 악을 썼지만 청년들은 그녀의 몸을 들어 바다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풍덩." 남편의 석방을 고대하던 고종엽의 바람은 완도 앞바다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8월 11일의 일이었다. 

좌익 끈이 없어 죽어야 했던 사람들

그날 완도군 소안면 구도리 청년들은 인민군을 노화면 동천리 천구마을로 데려왔다. 그들은 반동 인민재판을 한다며 천구마을 유력자를 붙잡아 들였다. 자기 고향에서 동향 사람들을 해코지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청년들이 다른 동네로 가 인민재판을 벌인 것이다. 

연행자 중에는 일제강점기 완도와 노화면 해태조합에 근무했고 당시에는 구장(이장)을 본 손남석(1911년생)과 조진호(가명), 손기문(가명)이 있었다. 이들은 천구마을 유력자이자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노화면 이포리 농협창고에 구금됐는데 거기에는 노화면 유지들이 많았다. 창고에 갇힌 이들은 "언제 인민재판을 받나, 형량은 얼마나 받을까"라며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손남석과 함께 끌려온 조진호와 손기문은 석방이 되는 게 아닌가. "동생들이 좌익이었대." 조진호 친동생이 완도군 지방좌익의 지도자이고 손기문 사촌동생이 좌익패였다. 아내 고종엽이 완도 앞바다에서 고깃밥이 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손남석은 8일간 농협창고에 구금돼 있었다.

"모두 나왓!" 저승사자 같은 좌익패의 고함에 사람들은 차례로 전마선에 올랐다. 평생을 고기잡이로 살아온 이들이었지만 그토록 바닷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완도군 노화면의 맞은편은 땅끝마을 해남군 송지면 월송리(현재의 현산면 월송리)였다. 뒷결박 당한 이들이 비칠비칠 야산으로 걸어가고 잠시 후 총성이 울렸다. 좌익 끈이 없던 손남석이 땅끝 해남에서 학살당한 날은 1950년 8월 19일이었다.

이후 손성좌는 아버지 손남석의 시신을 찾으러 해남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18살의 손성좌가 이리저리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후 마을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손성좌의 당숙인 손금석(당시 21세)이 마을 좌익패들을 붙잡아 공회당 마당에서 취조(?)를 한 것이다. "사촌 형(손남석)을 어떻게 한겨?" "..." 묵묵부답이었다. 혈기왕성한 손금석은 몽둥이를 들고 한 청년의 어깨를 내리쳤다. 다음 청년을 내려치려는 순간 "금석이... 성좌 어무이는 말여"라며 청년의 입에서 두 달 전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 좌익 청년은 고종엽을 배에 태워 노화면 소재지인 이포리로 가던 중 남부리 부근에서 수장시킨 일을 실토했다. 그녀를 수장시킨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남편 손남석을 살리기 위해 집안 아저씨에게 빌린 3만 원을 꿀꺽한 좌익패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녀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까지도 엄마의 행방을 몰랐던 손성좌 남매들은 곡을 터뜨렸다. 아버지에 이어 엄마까지 지방좌익패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반공인사가 빨갱이로 둔갑(?)

집안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지방 좌익에게 학살당하자 손성좌 남매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6남매 중 넷째인 손영운(1940년생)은 12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될 수 있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그는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되었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독학을 한 그는 목포 홍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그는 20대 초반 서울 가락동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차렸다. 김, 미역, 멸치, 다시마 등을 팔며 그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재물운이 있었는지 제법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학살된 현장에 선 손영운
 아버지가 학살된 현장에 선 손영운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정규대학을 가지 못한 손영운은 평생교육에 매달렸다. 전남대 경영대학원을 시작으로 건국대 대학원을 이수했다. 45세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연수를 다녀왔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았다. 성균관 유교 교육원과 선비학당을 다녔으며,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를 전공했다.

6개 대학원(사회교육)을 다닌 그가 80대에 드디어 정규대학을 다닌다. 집 나이 83세인 그는 2022년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또 그는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강인덕·박재규·정세현 통일부장관 시절 통일부 전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손남석이 반공투사는 아니지만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게 학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손영운의 집안은 자연스럽게 반공인사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영운의 작은형 손성위가 군대 갔는데 3급 비밀 취급인가가 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인가가 나기는 했지만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제대 후 지방공무원 시험에 수석 합격했는데 발령이 나지 않았다. 이 역시 시일이 걸려 발령을 받아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런데 국회에 근무하던 손영운의 동생 손성태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손성태가 외국에 나가야 하는데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형 성위와 동생 성태에게 이런 일이 생기자 손영운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완도경찰서, 전라남도 경찰국,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민원을 냈다. '아버지 손남석이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왜 연좌제를 적용하느냐'라는 내용이었다. 완도경찰서와 전라남도 경찰국의 조사 결과는 너무나 황당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남석은 반공인사가 아니라 빨갱이로 둔갑돼 있었고, 때문에 유가족이 30년간 신원조회를 받아온 것이다.

알고보니 노화면 동천리 천구마을의 손경석이라는 자를 손남석으로 혼동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손경석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돼 정부의 감시대상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런 사실이 밝혀졌고, 1982년 4월 12일 자로 전남경찰국이 진정인 손영운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그 사실을 정정했음을 문서로 통지했다.

손영운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 손남석과 어머니 고종엽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청했고, 그 결과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았다. 그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부모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보상과 아버지 유해발굴을 희망하고 있다.
 
전남도 경찰국에서 손영운에게 보낸 신원조회 해제관련 공문
 전남도 경찰국에서 손영운에게 보낸 신원조회 해제관련 공문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태그:#완도, #한국전쟁 , #손영운, #좌익, #민간인학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