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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밥상.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은 기미상궁이다.
▲ 수라상 임금님의 밥상.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은 기미상궁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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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새아침이 밝았다. 해는 솟았지만 자욱한 안개에 잠겨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밤새워 숙위하던 군사들은 물러가고 주간 근무자들이 자리를 잡느라 분주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노복과 무수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복구이에 독이 들어있다."

수라를 들던 인조가 숟가락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미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자신이 역할을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면 목숨이 위태롭다. 사색이 된 기미상궁. 오금이 저리고 손이 떨렸다.

궁이 발칵 뒤집혔다. 임금이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면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내란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다. 전복이 생물이라면 산지에서부터 문제가 된다. 허나, 전복은 완도에서 건조되어 진상된 건어물이다. 그렇다면 조리과정에 문제가 있을까? 혐의는 어주방(御廚房)에 쏠렸다.

현판
▲ 수라간 현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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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는 대주방과 소주방 그리고 어주방이 있다. 대주방(大廚房)은 궁에서 벌어지는 각종 연회를 담당하고 소주방(小廚房)은 평소의 음식을 담당한다. 그 중에서 어주방은 왕과 왕후의 음식을 전담한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 수라상 바로 옆에는 기미상궁이 붙어 앉아 수라간에서 음식이 오면 먼저 맛보고 수라상에 올린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음식에 독이 들어있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독은 필시 강씨가 넣었을 것이다. 난신적자(亂臣賊子) 강씨를 후원에 유치(幽置)하고 동궁 나인들을 내사옥에 하옥하라."

임금이 강빈을 지목했다. 강빈은 연금 상태다. 오가는 발길도 끊긴 지 오래다. 이러한 강빈을 임금이 물증도 없이 범인으로 지목하다니 해괴하다. 내전 환관(內宦)들이 동궁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내사옥(內司獄)도 하수상하다. 내수사(內需司)에서 관장하는 내사옥은 왕실재산 관련 범죄를 취급하다가 궁궐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확대되었다. 임금을 독살하려한 사건이라면 의금부에서 맡아야 하고 전옥서에 가두어야 한다. 사건이 궁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4면이 막힌 방에 강씨를 가두고 작은 구멍을 통하여 물과 음식을 넣어 주어라."

내환들이 강빈을 호송하러 간 사이 후속 명령이 떨어졌다. 내환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차기 권력과 충돌하는 현재 권력

"강씨가 비록 불측한 죄를 짊어졌다 하더라도 시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선에 독이 들어있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온 세자(봉림대군)가 읍소했다.

"네 놈이 감히 아비의 명에 토를 달려 하느냐?"
인조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죄지은 흔적이 분명하지도 않은데 성급하게 이런 조치를 내리고 한 사람도 따라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가장 예민한 문제를 놓고 현재 권력과 차기 권력이 충돌했다.

"네 이놈! 세자를 당장 끌어내라."
소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뒷동산이고 내 권좌가 아무리 높다 한들 지는 권력이겠지. 지는 해에 미련을 갖다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또 다시 지는 해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

대륙의 지는 해 명나라를 떠올리며 인조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소식은 즉시 소의 조씨에게 보고되었다.

압록강 오리알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냐?

"뭣이라고?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네놈이 누구 덕에 세자가 되었는데 건방을 떨고 있어. 네 머리위에 모자를 씌워준 것은 네 아비가 씌워주었지만 네 아비를 움직인 것은 나야 나. 네 놈이 예뻐서 세자로 밀어준 줄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넌 칠삭이야. 숭선군이 조금만 컷어도 넌 어림없어. 하지만 그것은 장래에도 유효해. 그땐 넌 압록강 오리알이 될 거야."

무서운 여자다. 이 때 소의 조씨 소생 숭선군 이징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너의 아부지 혁명 본능을 조금만 자극하면 돼. 너들은 너희 아버지를 엄청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할런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더 이상 망가질 게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막장 인생이야.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갔지. 일국의 임금 주제에 오랑캐 앞에 무릎 꿇고 항복했지. 세자 자리에 있던 맏아들 아작 냈지. 종법을 무시하고 둘째를 세자 세웠지. 원손을 내쳤지. 이런 사람 조금만 긁어주면 내 몸에서 태어난 숭선군이 왕 되지 말란 법 없어."
인간 이종(李倧)을 속속들이 해부하는 눈이 섬뜩하다.

"어림없는 소리라고? 너희 아버지 혁명가? 인정해. 체격은 작고 땅딸하지만 차돌처럼 야무진 데가 있거든. 그러니까 목숨 걸고 혁명했겠지. 그런 너희 아버지를 너들은 하나도 닮은 데가 없어. 소현, 너, 인평 자세히 살펴봐. 마음씨 좋은 네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착하기만 해. 근데 숭선군은 아냐. 내속으로 낳은 내 새끼이지만 지 아비를 닮아서 그런지 야멸찬데가 있어. 네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배다른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갈 놈이야. 그러니 너, 건방 떨지 말고 조심해. 아써 임마."
소의 조씨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시종 한 사람을 딸려 보내라."

인조가 세자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이는 지는 해가 떠오르는 태양에게 졌다기보다도 세자의 덕성을 널리 알리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인조가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강빈이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정이 많은 주상이 시종 한 사람 정도는 넣어 주리라 예상하고 내가 귀여워하는 시녀를 미리 준비해 두길 잘했지. 그렇지만 어림없다. 내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한 네년의 눈에 피눈물이 나는 것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해. 목마른 네년이 우리 아이들에게 물 한모금만 달라고 애원할 때, 내가 너에게 직접 가 딱 한모금만 줄거야."
소의 조씨의 입가에 독기가 서렸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여자의 마음 알기나 아느냐고?

"내가 주상의 승은을 입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어. '나도 이제 왕자를 생산하겠구나' 생각하면 하늘을 날고 싶었어. 이러한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어. 중전도 회임했고 너도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야. 내가 먼저 임신했으니까 제일 먼저 낳았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딸이었어. 인력으로 못하는 일이었지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어.

그리고 중전이 아들을 낳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지. 그때 네가 아들을 낳은 거야. 국상 중에 낳았지만 원손을 낳았다고 야단법석 그런 경사가 없었다. 눈꼴 아파서 못 보겠더라. 난 한없이 초라해진 거야. 똑같이 임신해서 낳았는데 누군 축하받고 누군 불쌍해져도 되는 거냐? 난 그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더라구.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여자의 마음 알기나 아느냐고? 그 때 난 결심했어. 널 벼랑에 세우겠다고, 그리고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 볼꺼라고.

소의 조씨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기나 긴 세월 가슴에 묻어왔던 성취의 눈물이었다.

덧붙이는 글 | 난신적자(亂臣賊子)-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어선(御膳)-임금님의 음식



태그:#수라상, #어주방, #강빈, #소현세자,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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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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