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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차나무꽃, 차꽃은 10월부터 12월까지 찬 서리 속에서 더욱 영롱하게 꽃을 피운다. 차나무는 옮겨심으면 쉽게 죽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차씨를 선물한다고 전해 지고 있다. 아마도 차나무처럼 개가치 말고 가문을 빛내달라는 뜻이었나 보다.
 차나무꽃, 차꽃은 10월부터 12월까지 찬 서리 속에서 더욱 영롱하게 꽃을 피운다. 차나무는 옮겨심으면 쉽게 죽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차씨를 선물한다고 전해 지고 있다. 아마도 차나무처럼 개가치 말고 가문을 빛내달라는 뜻이었나 보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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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여행

화전부터 육로여행이었다. 우리 가족단은 말 스무 필을 임대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마차가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주 흙은 매우 차지기 때문에 발을 디디면 진흙이 찰떡같이 달라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땅을 '늪 땅'이라고 했다. 차라리 겨울에는 땅이 얼어 마차로 다닐 수 있지만, 그밖에는 마차 대신 말을 이용했다.

만주 말은 조선 말보다 몸집이 컸다. 말에 짐을 잔뜩 싣고, 그 짐 위에 어린이와 노인들만 태웠다. 나는 어리다고 다행히 말을 탔다. 며칠을 갔는지, 말 위에 앉아가기도 매우 지루하고 힘들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이라고 하더니, 말 타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흙길을 걷는 것은 더더욱 고역으로 그나마 호사였다. 긴 육로여행에 모두가 지쳤는지 길을 가면서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말을 타고 가는 노인이나 아이들도, 진흙길을 걷는 어른들도…. 모두 마음속으로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정든 고향 땅에서 일제에게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대한 원망감을 삭이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첩첩 산중을 지나기도 하고, 끝없이 넓은 벌판을 지나기도 했다. 스무 필의 말이 끄는 행렬은 일이백 미터나 될 정도로 길었다. 긴 봄날이 저물면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어른들은 여관에서 주인과 말이 통하지 않으면 붓으로 한자를 써서 필담을 했다.

날마다 저물녘에 들어선 만주 여관방은 기다란 무덤 속 같았다. 게다가 이부자리는 퀴퀴하고 몹시 더러웠다. 하지만 워낙 지치고 시장했기에 저녁밥만 먹으면 식곤증으로 모두 곯아떨어졌다. 중국인 마부들은 첫닭만 울면 영락없이 길을 떠났다. 우리 일행은 비가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며 나섰다.

그 무렵 만주인들은 밥을 몰랐다. 길을 가는 도중의 만주 주막 밥집에 들리면 서속이나 강냉이 죽을 주었는데, 그것조차 오래된 것들이라 냄새가 고약했다. 게다가 죽은 매우 묽었다. 우리 일행은 임은 땅을 떠난 이후 모든 일이 고생스러웠으나 특히 음식 때문에 가장 힘들었다. 만주인들은 음식들을 주로 돼지기름으로 요리했다. 그런데 그 기름들은 오래되고 부패한 것들로 비위가 상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중국 동삼성에서 만난 말들,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라 하여 북부지방, 특히 동삼성은 말이 엄청 많다(1999년 8월 제1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중국 동삼성에서 만난 말들,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라 하여 북부지방, 특히 동삼성은 말이 엄청 많다(1999년 8월 제1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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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현 다취원

우리 일행은 먼 길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게다가 제대로 먹지 못하니 저마다 눈이 움푹 들어가는 등 몰골이 몹시 상했다. 어느 하루는 여관 주인에게 장을 얻어와 반찬으로 먹고자 가족들이 둘러앉았다. 나는 장 속에 건더기 같은 게 보여 풋고추 박아 놓은 걸로 알고 덥석 집어 입안에 넣다가 기절을 하고 도로 뱉었다. 그것은 고추 꼬투리가 아니라 쥐꼬리였다.

그 먼 길을 걸어가는 어른들은 발이 부르트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편 말 위에 앉아가는 사람도 편치 않았다. 비탈길을 오르면서, 또는 깜빡 졸다가 말 위에서 낙상하는 일도 잦았다. 어머니는 그만 말에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갈 길이 바빠 제대로 치료도, 요양도 못한 채 떠났다.

압록강을 거스러는 물길도 지겨웠지만 해동한 진흙 길을 걸어가는 길은 그보다 더 힘들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 산길이 물길보다 더 어렵다'는 옛 시조 그대로였다.

육로여행은 쉼 없이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날로 기진맥진 지쳐갔다. 도중에 비가 오면 신발에 달라붙는 진흙 때문에 몇 배나 힘들었다. 말 타기에 지친 아이들은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빗길을 걸어갔다. 마침내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통화현 다취원이란 곳에 다다랐다.

다취원은 일찍이 독립운동지사들이 해외독립운동 기지로 삼은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동안 말을 끌고 온 마부들은 그곳이 자기들과 계약한 종착지라고 하면서 짐을 풀고 곧장 떠나버렸다. 그곳 일대에는 경술국치 이듬해 본국에서 건너온 애국지사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 다취원에는 대략 열 집 정도의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을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그 무렵 조선에서 망명을 오거나 무슨 중대 임무를 띠고 오는 사람들을 최종 정착지까지 안내해 주는 일을 맡고 있었다. 첫날은 안동사람 하재우씨 댁에 머물렀는데, 고향 집을 떠난 이후 처음 제대로 밥을 먹었다. 그 밥맛이 꿀맛으로 난생 가장 맛있는 밥상이었다.

지린성 통화. 지난날 이곳은 우리독립지사들이 거쳐가는 길목이었다(1999년 8월 제1차 항일유적 답사 때 촬영).
 지린성 통화. 지난날 이곳은 우리독립지사들이 거쳐가는 길목이었다(1999년 8월 제1차 항일유적 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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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사는 망명객들

거기서 우리 일행은 며칠 더 묵으며 생기를 되찾은 뒤 다시 왕산 당숙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다황거우라는 곳으로 찾아갔다. 왕산 당숙 댁은 고향 구미 임은에서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종을 두고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막상 뵙고 보니 너무나 초라했다. 많은 식구들이 산비탈 토굴 같은 데서 방 두 칸 겨우 마련하여 빼곡히 무리지어 살고 있었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 일가들은 서로 붙잡고 말없이 한동안 울기만 했다. 우리 일행은 왕산 당숙 댁이 만주에서 그렇게까지 궁벽하게 사는 줄은 몰랐다. 왕산 댁만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까 서울에서 살다온 삼한 갑족 우당 이회영씨 형제들도, 안동에서 살다온 석주 이상룡씨도, 일송 김동삼씨도 모두 '오십 보 백 보'였다. 그렇게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이 당시 만주로 망명을 온 동포들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나라를 빼앗겨 다른 나라로 망명한 동포들의 참 모습으로, 그들은 그런 궁벽한 삶 속에서도 서릿발 같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게 당시 독립지사와 그 가족들의 긍지요, 자존심이요, 독립정신이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현지에 적응코자 왕산 댁에 짐을 풀었다. 우리 큰집(허형) 작은집(허필)은 왕산 댁 옆방에다 잇대어 방을 대여섯 칸 더 달아냈다. 마 서방을 비롯하여 우리를 따라온 이들은 그 이웃에다 움집을 지었다. 날이 풀려 점차 따뜻해지자 홑이불만 덮어도 견딜 만했다. 그때부터 우리 일행의 만주생활이 본격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온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산을 개간하여 화전 농사를 시작했다.  

언저리 산의 울창한 나무들은 벤 뒤 그곳에다 불을 질렀다. 그 나무들이 다 타고 나면 재가 수북했다. 게다가 땅바닥에는 오래 묵은 나뭇잎들이 쌓여 있었기에 거름은 매우 좋았다. 얼치기 농사꾼들이 산비탈 높은 곳에서 곡괭이를 끌고 쭉 긁어내려오면 고랑이 생겼다. 그 두둑에 옥수수, 콩, 조, 등의 씨앗을 뿌리고 감자 싹을 심었다. 만주 땅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씨앗을 뿌린 뒤 꼭꼭 밟지 않으면 싹이 나다가 모두 쓰러진다고 했다.

중국 동삼성의 벼논들. 이 벼논들을 개간한 사람은 우리 동포들이었다(2005년 5월, 제3차 할일유적답사 때 유하현 삼원포에서 촬영).
 중국 동삼성의 벼논들. 이 벼논들을 개간한 사람은 우리 동포들이었다(2005년 5월, 제3차 할일유적답사 때 유하현 삼원포에서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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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병

임은 허씨 일족들은 고향에서 양반이라 하여 호미 한 번 제대로 잡지 않았다. 이들이 생전 처음 화전 농사를 짓자니 잘 될 리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 농사는 바로 이웃에 사는 마 서방네가 와서 많이 도와줬다. 우리 집안에서는 일찍이 갑오경장 직후부터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주종관계를 모두 청산했지만, 마 서방네는 그동안 우리 가족과 일가들에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며 한 집에서 살았었다.

장정들이 나무를 베거나 밭일을 하면 남녀 아이들은 바가지로 물을 떠다 나르거나 새참 같은 걸 날랐다. 또 산에 지천인 잔대, 더덕, 도라지 같은 나물을 캐서 밥반찬을 만들었다. 식수로는 도랑물을 먹었다. 그런데 만주의 도랑물은 대체로 맑지가 않았다. 아마도 산이 높지 않고 평야가 많아 계곡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는 탓으로 흐린 듯했다.

그해 오뉴월, 날씨가 더워지자 마을 조선사람 모두가 발병했다. 그 병명은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물 때문에 생긴 전염병으로 일종의 풍토병이었다. 여름 석 달 내내 그 병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그 수토병으로 대부분 조선 망명객들은 한두 차례 된통 앓았다. 마 서방에 막내아들 춘돌이, 성산 당숙 처조카 송씨 등은 여러 날 앓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우리 집에서는 나와 어머니가, 큰집은 은이 누이와 큰어머니가 두어 달 앓았다. 어찌나 독하게 앓았던지 아이들 머리칼조차 새대가리처럼 까칠했다.

수륙만리 온갖 고생 끝에 도착한 새로운 삶터에서 댓바람에 겪는 일이라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온 곳에서 고생만 하고 죽어가자 사람들은 울음조차 잃어 버렸다.

그해 가을, 힘들게 개간하여 농사지었던 곡식들은 추수하자 형편없었다. 가을을 지나자 양식이 떨어졌다. 당장 겨울 양식이 걱정이었다. 집집마다 고국에서 가져온 옷감들을 꺼내 만주사람들에게 팔아 좁쌀이나 옥수수를 사서 양식을 늘이고자 죽을 쑤어 끼니를 이었다. 망명 이민자들은 옷가지가 떨어지자 은가락지 은비녀 같은 패물을 처분하여 양식을 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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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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