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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웨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백조를 볼 수 있다
 골웨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백조를 볼 수 있다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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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고, 기도하고

20일. 프리랜서인 내게도 생애 최초로 가장 긴 여정이었다. 여행이 장기화되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더욱 느리고 더욱 가난한 여행이 예고되고 있었다.

숙식은 유학생 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말이 좋아 신세지, 한 마디로 민폐, 기생(寄生)이었다. 정말 한 마리 기생충이 된 것처럼 살았다. 일단 알람을 맞추지 않고 실컷 잤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 그만인 하루도 있었다. 그 동네에 강과 바다와 성당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어느 소설가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무슨 일에든 성과를 내야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심지어 여행도 '인증샷'을 남겨야 한다. 어느 나라를 갔으면 대표적 여행지는 꼭 찍고 와야 하는. 이 바쁜 세상에서 우리는 어쩌면 쉬어야 할 자유마저도 빼앗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기도 하고, 새들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멍 때리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가끔 한국에서 받은 상처들에 분노가 치밀 때면, 가까운 성당으로 달려가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어느 영화 제목 같은 날들이 흘러갔다. '먹고, 자고, 기도하는'.

다시 더블린으로... 남자 3명과 한방에서 자다

직원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
 직원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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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주일. 두려움과 맞서 보고픈 욕심이 났다. 유학생 친구의 집을 벗어나 진정으로 혼자 하는 여행. 물론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남은 2주를 오롯이 홀로 보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숙소 문제도 컸다. 여행지에서 밥은 굶고 다닐 수 있어도, 씻고 자는 데 이상한 결벽이 있어 과연 공동 숙소에서 지낼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현실로 닥치니 이상한 배짱이 생겼다. 기왕 도전하는 거면, 세게 나가자. 골웨이를 떠나 다시 더블린으로 온 나는 6인실 남녀 혼성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가격은 조식까지 포함해 우리 돈 2만 원 정도였다.

'혹시 내가 잠든 순간, 집적대기라도 하면 어쩌나?'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대진 않을까?'
'설마 남자 5명에 여자는 나 1명이 아닐까?'

온갖 상상을 하고, 숙소 문을 여니 남자 3명에 나까지 여자 2명이다. '휴, 천만다행이다. 저 여자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지만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여자는 나를 본체만체한다. 오히려 20대 남자 한 명이 악수를 청한다. 여자와 일행으로 보이는 30대 남자와 장기 체류자로 추정되는 할아버지와는 가벼운 눈인사로 대신했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다른 이들과 한방에서 동침을 하려니, 순간 오싹하다. 나는 되도록 촌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찍 씻고 잠을 청하기로 한다.

"코 고는 거 말고는 괜찮을 거야!"

게스트하우스를 많이 다녀봤다는 친구의 메시지가 힘이 됐다. 그래도 긴장이 돼서 얼마 되지도 않은 현금이 든 배낭을 힘껏 끌어안은 채, 눈만 감고 있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일정한 간격으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올 것이 온 것인가. 그런데 정작 코골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를 본체만체한 여자였다. 젊은 두 남자도, 할아버지도 조용히 잠만 잤다. 피식. 헛웃음이 났다. 덕분에 긴장도 풀리고, 꽤 잘 잤다. 아마 두 번째 코골이의 주인공은 나였을지도 모를 정도로.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나는 당연히 욕실을 쓰는 사람이 여자일 걸로 추정하고, 1시간을 예상했다. 그런데 욕실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가 아니었다. 부지런한 남자 3명이 5분 만에 교대로 씻고 나왔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겠지.

"굿모닝!"

퉁퉁 부은 얼굴을 최대한 수건으로 가리고 욕실로 향하는데, 어제 악수한 그 청년이 또 인사를 한다.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말았다. 유쾌한 청년의 인사로 아침을 여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완벽하게 게스트하우스 생활에 적응했다. 그런 나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스스로 결벽이나 한계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넘지 못한 하나의 벽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여행지가 아닌 삶의 무대를 만나다 

추위도, 삶의 고단함도 잊은 거리의 예술가
 추위도, 삶의 고단함도 잊은 거리의 예술가
ⓒ 조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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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만에 다시 온 더블린 풍경은 처음과는 달랐다. 들떠 있던 여행자에게 영화 <원스>의 주 무대였던 그래프턴 거리는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런데 다시 그 거리를 여러 번 오가다 보니 홍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저 멋져 보이기만 하던 버스커(거리의 악사)들의 얼굴에서 삶의 무게도 읽히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이 장기화되면서 낭만은 사라졌지만, 나는 어쩐지 진짜 아일랜드를, 그리고 진짜 이곳 사람들의 삶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의 상징, 스파이어(바늘 모양의 거대한 첨탑)가 서 있는 거리 곳곳을 채운 노숙인들과, 1~2유로의 저가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에 길게 늘어선 줄. 유럽 중에서도 특히 아일랜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골목골목을 다녔다. 지금 더블린 중심가를 지도로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만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그곳에서 자주 길을 잃었고, 또 결국엔 물어물어 길을 찾았다.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 일은 나이 들어갈수록 새로운 도전보다는 익숙함에 길들여지고 있던 내게 '조금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일깨워줬다.

물론 혼자 하는 여행은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고독하다. 식당에서 가족들 사이에 끼어 식사할 때면 왠지 서러워졌고, 말할 사람이 없어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럴 때면 초콜릿을 야금야금 까먹었다. 신기하게도 효과는 '직빵'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입맛이지만, 난 앞으로도 인생이 쓰게 느껴질 때면 초콜릿을 까먹을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은 을들의 만남, 그리고 시작된 나의 이야기

여행하는 동안만큼은 되도록 한국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참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 이슈가 된 일명 '땅콩 현아'의 소식이었다.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박창진 사무장의 등장. 그것도 얼굴과 실명을 모두 드러내고 인터뷰를 하다니. 오 마이 갓. 이 사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아닐까. 나도 수년간 시사 프로그램에 몸 담았기에 잘 알고 있다. 모자이크를 하지 않고 인터뷰를 한다는 건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는 뜻이라는 걸. 존경의 마음과 동시에 내부 고발자들이 보통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그 밤, 오래 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늦은 나이에 아일랜드에 유학을 와 있다는 그와 급히 약속을 잡았다.

"어쩌다 여길 다 온 거야?"

맥주 한 잔을 마주하고 그의 안부를 물었다. 몇 년 만에 본 그는 더 말라 있었다. 갑의 횡포부터, 갑보다 더 심한 을들의 텃새에 이르기까지. 결국 건강 악화로 모든 걸 접고, 요양차 이곳에 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나의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좋아."

그랬다. 불가피하게 '을'로 표현했지만, 난 사실 스스로 '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방송가의 프리랜서들도 마찬가지다. '을'이라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한 달에 1주일은 하루 1~2시간씩 자며 버텨내야 하는 삶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우리를 '을'로 규정할지 몰라도, 우리의 열정만큼은 '갑 중의 갑'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노트 한 권과 함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트 한 권과 함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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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우리는 을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왜 간혹 발생하는 부당한 대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걸까? 쉽게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친구를 통해 그나마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숨기고 싶은 상처를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만들었던 과거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작품은 기대 이상의 호평을 받았다고 했다. 진정성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려한 외모에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 같았던 그를 나는 다시 봤다.

그리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과연 14년 동안 글을 써오면서, 내 자신을 벗어던지는 글을 써보기나 한 건가. 그 수많은 취재원에게는 "세상을 바꾸려면 용기 내셔야 해요"라고 부추기면서, 정작 내 자신은 꽁꽁 감추고만 있지 않았는지. 많은 교류도 없던 내게 숨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를 보고 있노라니, 전에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나도 내 이야기를 써봐야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글 쓰는 것밖에 없잖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일 간의 아일랜드 여행(2014년 12월 9일~30일)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관광 정보보다는 방송인으로서 걸어온 제 길을 돌아본 기록임을 밝혀둡니다.



태그:#아일랜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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